여름 향기 물씬 풍기는 곳, 곰배령에 다녀왔다. 곰배령은 집중호우와 푹푹 찌는 가마솥더위로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지친 일상에 쉼표를 찍고, 야생화 만발한 곰배령 정상에 서면, 고개를 넘어오는 바람에 묻어나는 꽃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으니 천국이 있다면 아마 이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원래 곰배령은 바다와 내륙을 잇는 고갯길로, 예전엔 봇짐장수들이 양양에서 당나귀에 소금을 싣고 넘었고, 약초꾼과 심마니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다. 봇짐장수와 약초꾼도 모두 사라진 지금은 만발한 야생화와 서늘한 바람이 곰배령의 주인이다.
점봉산 자락을 넘어가는 낮은 목고개, 곰배령은 곰이 배를 하늘을 향하고 누워 있는 모양을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숲 모임에서 곰배령 산행을 계획하고 미리 인터넷 예약을 마친 터라 천상의 화원을 찾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기만 했다. 도심의 한증막 같은 무더위와 달리 곰배령 주차장에 도착하니 바람결이 마치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듯 서늘하기만 하다. 등산로 입구에서 등록명부를 QR코드로 확인한 후 입산 허가증을 받고 탐방로로 들어서니 우렁찬 계곡의 물소리가 반겨준다.
‘천상의 화원’이라는 점봉산 곰배령 정상까지는 5.1㎞, 해발 1164m로 점봉산에는 자생종의 20%에 해당하는 85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어 국제기구 유네스코(UNESCO)가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한 천혜의 장소다. 왕복 10㎞ 정도의 곰배령은 계곡 주변의 넓고 평탄한 숲길을 따라 걷는 길이라 남녀노소 누구나 어렵지 않게 트레킹할 수 있다. 산책로 초입부터 귀를 씻어주던 계곡의 물소리가 발걸음을 옮길수록 점점 깊고 웅장하다. 비록 하늘이 흐렸다 해도 가마솥더위가 절정인 삼복(三伏) 중인데 물소리를 싣고 오는 바람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하다.
탐방로를 따라 점점홍으로 피어 있는 야생화들이 자주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한여름에 점봉산 곰배령에 간다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정상을 목표로 하는 등산과 달리 야생화의 매력에 취해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여유롭게 산책하듯 걷게 된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여름꽃들의 향연. 들머리인 진동리 설피마을에서 신선이 내려왔다는 강선마을까지는 이웃집 마실 가듯 걷는 길이요, 만나는 꽃 이름, 나무 이름을 하나씩 가슴에 새기며 걷는 길이다. 야생화 꽃빛으로 눈을 씻고 고즈넉한 계곡의 물소리에 귀를 씻고 나면 신선이 따로 없다.
강선마을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신갈나무와 당단풍,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서어나무, 고광나무, 난티나무, 들메나무…. 수많은 활엽수가 초록의 그늘을 넉넉히 드리운다. 얼마만큼 올라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문득 하늘이 환히 열리며 산상 초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나무가 없는 고산 초원은 말 그대로 ‘야생화 천국’이다. 개구릿대, 둥근이질풀, 도라지모싯대, 동자꽃, 마타리, 곰취, 노루오줌, 큰뱀무, 각시취…. 일일이 이름을 다 불러주기엔 꽃의 종류가 너무 많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 야생화 군락의 훼손을 막기 위해 곰배령의 초지 길은 모두 나무 덱으로 돼 있다. 여름꽃들이 절정을 지나고 있는 곰배령엔 수시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지날 때마다 연신 고개를 흔들어대는 분홍, 주황, 노랑, 보라 등 각양각색의 꽃들을 감상하며 나무 덱 위를 걷는 맛은 직접 걷지 않고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잦은 장맛비와 무더위에 심신이 지쳤다면 야생화 천국인 곰배령을 찾아가시라 권유하고 싶다.
천상의 화원, 곰배령에 가서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병풍처럼 둘러친 산의 정기를 받고 맑은 바람에 마음을 헹구고 나면 틀림없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종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85kimjc@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