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평에는 주민들의 추천으로 고르고 정한 ‘가평팔경’이 있다. ‘용추구곡(龍湫九曲)’은 가평을 대표하는 여덟 곳의 명소 중에 제3경에 속한다. 연인산도립공원의 용추구곡은 하류의 가평읍 승안리 용추폭포에서부터 물길을 거슬러 칼봉과 노적봉 사이를 지나 연인산에 이르는 10여㎞의 계곡을 이르는 이름이다. 여름이면 수도권 인근 피서객으로 만원을 이루는 용추구곡은 계곡 초입의 용추폭포 이름을 땄다. 이곳에 조선 말 성리학자 유중교가 처음 붙인 이름은 옥계구곡이었다고 한다. 이곳의 자연경관이 중국의 무이구곡이나 황해도 고산의 고산구곡, 속리산의 화양구곡에 견줄 만하다며 “무릉도원이 따로 없고 여기에 있으면 세상 모든 시름을 잊을 만하다”고 감탄했다 한다.
옥계구곡은 일부만 장소가 확인되던 것을 지난 2018년 국립수목원이 문헌을 뒤지고 현장 조사를 벌여 1곡부터 9곡까지 모두 다 찾아냈고, 이를 산림청 국가산림문화자산으로 지정했다. 구곡의 이름은 하류에서 상류로 올라가면서 순서대로 붙여졌다. 1곡 와룡추(臥龍湫), 2곡 무송암(撫松巖), 3곡 탁영뢰(濯纓瀨), 4곡 고슬탄(鼓瑟灘), 5곡 일사대(一絲臺), 6곡 추월담(秋月潭), 7곡 청풍협(靑楓峽), 8곡 귀유연(龜游淵), 9곡 농원계(弄湲溪). 형태와 농담, 소리는 물론이고 경관의 밀도까지 한자로 담아낸 이름들인데, 하나하나 한자의 뜻을 새겨가며 구곡을 찾아가는 즐거움이 걸음을 재촉하게 만드는 곳이다.









아침 일찍 경춘선 전철을 타고 가서 가평역에서 내려 71-4번 버스를 이용해 용추계곡 입구에 내렸다. 아직도 여름의 기운이 남아있어 단풍을 보기엔 이르지만, 물가의 찰엽수가 일찍 물들어 가을 정취를 자아낸다. 계곡 주차장에서 물소리 길을 따라 트레킹을 시작하려 했지만, 산사태로 통행로가 막혀 있는 바람에 길을 되돌려 다시 용추구곡을 따라 거슬러 올랐다. 우렁우렁 들려오는 물소리를 따라 걷다 보니 제1경인 와룡추(용추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며 우리를 반긴다. 용추폭포는 누웠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룡추 또는 용추라 부르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용추폭포는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는 없다. 최근 많은 비가 내려 사고 위험이 있어 출입통제선을 쳐 놓았다. 굳이 다가서지 않아도 물소리는 가까이 들리고 물이 흘러내리는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폭포들이 하얗게 물줄기를 쏟아내며 우리를 반긴다. 간간이 산사태 흔적이 보이고 등산로가 막혀 있기도 하다. 제6곡인 추월담까지 갔다가 물길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되돌아와야 했다. 하지만 물소리를 벗하여 오가는 길은 혼자 걸어도 좋고 벗들과 함께 걸어도 좋은 길이다.
사과밭에 사과가 붉게 익어가고 노란 산국이 소담스레 피어 있는 길을 걸으며 물소리에 귀를 씻던 용추구곡 트레킹은 네 마음에 작은 쉼표 하나 찍어놓은, 운치 있는 숲길로 오래 기억될 것만 같다. 올가을엔 내 마음도 가을 물처럼 맑아져서 곱게 단풍이 들었으면 싶다.

백승훈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