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 울산테크노파크단장(국제정치학 박사)
이미지 확대보기그동안 대한민국은 동해안을 대륙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단절의 공간처럼 인식해 왔다. 그러나 북극 항로 시대가 열리면 동해는 더 이상 끝이 아니라 유라시아와 북극, 태평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출발점이 된다. 부산·울산·포항·원산은 북방 공급망과 에너지 흐름을 연결하는 전략 거점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우리의 준비다. 우리는 여전히 수도권과 남한 중심 전력 수요만 바라보며 국가 인프라를 설계하고 있다. 성장률 둔화를 이유로 전력 설비 투자를 최소화하자는 논리도 반복된다. 그러나 북극 항로와 북방 경제가 본격화되고, 북한 지역의 산업·물류 체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면 지금과 전혀 다른 규모의 전력과 에너지 수요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북한 에너지 문제는 단순한 인도적 지원 대상이거나 정치적 활용 카드가 아니다. 에너지 인프라는 산업과 물류, 통신과 데이터, 기술 표준을 연결하는 국가 시스템의 중추다. 향후 북한 개방과 경제 협력이 현실화될 경우 우리가 준비하지 못한다면 중국 전력망과 러시아 가스망, 중·러식 산업 표준이 한반도 북부에 먼저 자리 잡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 에너지 문제는 결국 대한민국의 미래 경제영토와 연결된 안보 전략의 문제다.
둘째, 북한형 분산에너지 모델을 준비해야 한다. 낡아 빠진 북한 전력망에는 대규모 중앙집중형 발전소보다 마이크로그리드, 수소연료전지, ESS, 이동형 발전 시스템 같은 분산형 접근이 현실적일 수 있다. 특히 국내 조선산업이 축적한 선박용 발전·배전·제어 모듈 기술은 육상형 독립 전력 시스템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미래 조선업은 단순히 배를 만드는 산업이 아니라 에너지 시스템 자체를 패키징해 공급하는 플랫폼 산업으로 진화할 것이다. 이동형 전력공급 시스템과 모듈형 에너지 패키지는 북한뿐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도 새로운 산업 기회가 될 수 있다.
셋째, 울산-나진-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북방 에너지·물류 회랑을 구상해야 한다. 북극 항로와 LNG·암모니아 공급망, 북방 광물자원, 조선·항만 산업을 연결하는 새로운 산업 축을 장기적으로 준비할 필요가 있다.
넷째, 한반도 에너지 및 기술 표준을 선점해야 한다. 송전 규격과 스마트그리드 운영체계, 청정수소 인증, AI 기반 전력관제 플랫폼 등 미래 산업 생태계의 표준을 누가 설계하느냐에 따라 공급망과 시장의 주도권이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부 주도의 계획경제식 접근이 아니다. 다양한 기업들이 새로운 전력 비즈니스와 에너지 서비스를 자유롭게 실험하고 경쟁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다. 정부는 시장 메커니즘이 작동하도록 해야 하지만, 차세대 항만 시스템과 긴급 전력공급 모듈, 초광역 송전망 같은 전략 인프라에는 공적 자금과 정책 금융을 과감히 투입할 필요도 있다. 시장은 효율을 만들지만, 전략은 국가가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급변하는 국제정세로 인해 한반도 허리를 묶고 있는 군사분계선은 곧 실선이 아닌 점선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에너지 표준과 통제권을 설계하는 자가 새로운 경제영토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남북을 연결하는 에너지 회랑으로 한반도의 번영을 준비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