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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초격차의 승부사들 "반도체 열전" ⑥ 도시바-키옥시아...일본의 무서운 승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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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호 진단] 초격차의 승부사들 "반도체 열전" ⑥ 도시바-키옥시아...일본의 무서운 승부수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 이미지 확대보기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전 고려대 교수
[김대호 진단] 초격차의 승부사들 "반도체 열전" ③ 도시바-키옥시아...일본의 승부수
‘도시바-키옥시아’의 대반전

세계 경제의 중심축이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로 급격히 이동하는 가운데, 글로벌 금융시장과 산업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대사건이 일어났다. 일본의 낸드플래시 반도체 전문 기업인 키옥시아홀딩스(Kioxia Holdings Corporation)가 일본 제조업의 상징이자 오랜 기간 일본 경제의 절대 권력으로 군림해 온 도요타자동차를 제치고 도쿄증권거래소 시가총액 1위에 등극하는 역사적 이정표를 세운 것이다. 시가총액 44조 엔을 돌파하며 1년 반 전 상장 당시와 비교해 기업가치가 50배 이상 폭등한 이 극적인 장면은 단순히 한 기업의 주가 급등을 넘어선다. 지난 30년간 글로벌 반도체 무대에서 변방으로 밀려났던 일본 반도체 산업이 마침내 완벽하게 부활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다.

과거 1980년대 세계 시장을 호령하다 미국과의 반도체 협정, 전략적 오판, 한국 기업들과의 과감한 치킨게임에 밀려 처참하게 몰락했던 일본 반도체 공룡들이 21세기 생성형 AI 혁명이라는 거대한 파도를 타고 다시금 전면에 부서져 나오고 있다. 그 중심에는 세계 최초로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발명하고도 모기업의 경영 위기로 분사당하는 수모를 겪었던 '도시바 메모리'의 후신, 키옥시아가 자리하고 있다. 키옥시아의 화려한 비상과 일본 반도체 생태계의 재건은 동아시아 반도체 공급망의 세력 판도를 뒤흔들고 있다

키옥시아의 뿌리이자 일본 전자 산업의 자존심이었던 도시바(Toshiba)의 몰락은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일본 반도체의 침몰을 상징하는 가장 생생하고 잔혹한 잔혹사이다. 1987년 도시바의 전설적인 연구원 마스오카 후지오 박사는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낸드플래시 메모리(NAND Flash Memory)'를 세계 최초로 발명하였다. 이는 전자기기의 소형화와 모바일 시대를 가능케 한 일류 혁신이었으며, 도시바는 낸드플래시의 원천 기술 보유자로서 글로벌 메모리 시장의 절대 권력자로 군림하였다. 1980년대 후반 세계 반도체 기업 순위 톱10 중 6개를 일본 기업이 싹쓸이하던 시기의 정점이 바로 도시바였다.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일본 반도체는 거대한 장치 산업으로 변모한 메모리 시장의 속도전을 쫓아가지 못했다. 완벽한 품질에만 집착하는 지나친 장인정신(모노즈쿠리)과 관료제적 의사결정은 과감한 선제적 투자와 미세공정 전환을 무기로 치고 나간 한국 기업들의 치킨게임에 무참히 짓밟혔다. 시장 주도권을 빼앗긴 도시바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도시바 경영진은 반도체 사업의 변동성을 상쇄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찾겠다며 파멸의 뇌관을 건드렸다. 2006년, 미국의 원자력 발전소 제조업체인 웨스팅하우스(Westinghouse)를 시장 가치의 두 배가 넘는 54억 달러에 인수하는 초대형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원전 르네상스를 기대한 도박이었으나,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터지면서 전 세계 원전 프로젝트는 전면 중단되거나 동결되었다. 웨스팅하우스는 천문학적인 손실을 쏟아내는 지옥의 블랙홀로 돌변하였다.

손실을 감당할 수 없었던 도시바 경영진은 파국을 막기 위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질렀다. 2008년부터 무려 7년간 그룹 전체가 조직적으로 이익을 부풀리는 '7년간의 분식회계 사태'가 2015년 세상에 폭로된 것이다. 부풀려진 허위 이익만 2,248억 엔에 달했다. 일본을 대표하는 초일류 기업의 도덕성은 처참하게 붕괴되었고, 신용등급은 정크(투자부적격) 수준으로 추락하였다. 자본잠식에 빠져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상장 폐지될 위기에 몰린 도시바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뿐이었다. 가문의 보물이자 유일하게 천문학적인 현금을 창출하던 '메모리 반도체 사업부'를 통째로 잘라내어 파는 살점 베어내기였다. 기술 유출을 극도로 꺼리던 일본 정부의 개입과 소송전 끝에, 2018년 도시바 메모리 사업부는 미국의 사모펀드 베인캐피털이 주도하고 한국의 SK하이닉스 등이 참여한 한·미·일 컨소시엄에 2조 엔에 매각되었다. 이 처절한 분리 매각 이후 2019년 10월, 도시바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고 새롭게 출범한 법인이 바로 '키옥시아(Kioxia)'이다. 140년 전통의 공룡 도시바는 결국 2023년 말 증시에서 쓸쓸히 상장 폐지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홀로 남겨진 키옥시아는 모기업의 범죄와 파산이라는 깊은 심연 속에서 독자 생존의 칼을 갈아야 했다.

상장 초기까지만 해도 낸드플래시 단일 품목에 의존하는 키옥시아의 미래를 향한 시선은 회의적이었다. 그러나 2026년 현재, 키옥시아의 시가총액이 도요타를 넘어서며 일본 증시의 왕좌를 차지한 대반전은 일본 반도체 산업의 구조적 부활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부활을 가능케 한 핵심 동인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생성형 AI의 폭발적 확산은 단순히 연산 장치(GPU, HBM)의 호황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AI 모델 학습과 추론을 위해 데이터센터가 처리해야 하는 데이터의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초고속·대용량·저전력 저장 장치인 엔터프라이즈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수요가 폭발하였다. 디램(DRAM) 없이 오직 낸드플래시에만 전사적 역량을 집중해 온 '순수 낸드 플레이어' 키옥시아에게는 최적의 전장이 열린 것이다. 키옥시아의 독자적인 3차원 적층 기술인 'BiCS FLASH'는 고부가가치 AI 서버 시장의 핵심 스토리지로 각인되며 기업가치를 상장 초기 대비 50배 이상 폭등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키옥시아의 화려한 비상은 일본 정부의 치밀하고 파격적인 보조금 정치의 산물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반도체를 단순한 상품이 아닌 국가 안보의 최전선 보루로 규정하였다. 정부는 키옥시아의 핵심 생산 기지인 미에현 욧카이치 공장과 이와테현 기타카미 공장의 첨단 라인 증설에 조 단위의 보조금을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과거 매각 시점의 외로운 처지와 달리, 현재의 키옥시아는 일본 정부의 전폭적인 재정적·행정적 비호 아래 자본가치와 생산 능력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 키옥시아는 미국의 웨스턴디지털(Western Digital)과의 공동 투자 및 합작 법인(JV) 관계를 전략적으로 100%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대규모 설비 투자에 따르는 재무적 리스크를 미·일이 절반씩 분담하는 동시에, 미국 주도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 기조에 완벽하게 편승하였다. 여기에 세계 최고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일본 내부의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가 키옥시아를 중심으로 단단히 결집하였다. 도쿄일렉트론, 아드반테스트, 호야 등 일본 증시의 또 다른 테크 공룡들이 키옥시아의 최첨단 공정 전환을 전방위로 지원하며 일본 반도체 밸류체인의 강력한 시너지를 완성하였다.

도시바 메모리의 비극적인 침몰에서 시작해 키옥시아의 일본 시총 1위 등극으로 귀결된 이번 대반전극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이 영원한 패자도, 영원한 승자도 없는 냉혹한 기술 전장임을 보여준다. 내연기관과 전통 제조업을 상징하던 도요타의 시대가 저물고, 첨단 AI 메모리와 반도체 공급망을 장악한 키옥시아가 왕좌를 차지한 것은 일본 경제 구조 자체가 테크 중심으로 완전히 개편되었음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다. 닛케이지수가 6만 선을 돌파하며 역사적인 초호황을 구사하는 배경에는 이처럼 철저히 준비된 일본 반도체의 부활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의 오판과 모기업의 분식회계라는 최악의 잔혹사를 딛고, 독자적인 기술력과 영리한 국가 전략을 통해 전 세계 반도체 패권의 중심부로 당당히 생환한 키옥시아의 모습은 일본 반도체 부활이 일시적인 신기루가 아닌, 거대한 구조적 흐름임을 명확히 증명하고 있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