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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망 생존 전쟁] 데이터센터 40곳이 동시에 전기를 껐다… AI 시대 '수요 붕괴'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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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력망 생존 전쟁] 데이터센터 40곳이 동시에 전기를 껐다… AI 시대 '수요 붕괴'의 역습

전력 과잉이 정전을 부르는 위기 현실화… 원전·SMR 보유국 한국에 열린 '에너지 패권' 기회
인공지능(AI) 혁명을 떠받치는 데이터센터가 갑자기 전기 사용을 일제히 중단할 경우, 남아도는 전기가 오히려 발전 설비를 파괴하고 대규모 정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인공지능(AI) 혁명을 떠받치는 데이터센터가 갑자기 전기 사용을 일제히 중단할 경우, 남아도는 전기가 오히려 발전 설비를 파괴하고 대규모 정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로 나타났다. 이미지=제미나이3
전력 부족이 아니라 전력 과잉이 전력망을 붕괴시킨다.

인공지능(AI) 혁명을 떠받치는 데이터센터가 갑자기 전기 사용을 일제히 중단할 경우, 남아도는 전기가 오히려 발전 설비를 파괴하고 대규모 정전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고가 현실로 나타났다. '수요 붕괴'라는 낯선 이름의 새 리스크가 세계 최대 데이터센터 밀집 지역인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잇따라 터지면서, 에너지 업계의 패러다임이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다.
미국 및 버지니아주 데이터센터 전력 점유율 전망. 도표=글로벌이코노믹이미지 확대보기
미국 및 버지니아주 데이터센터 전력 점유율 전망. 도표=글로벌이코노믹


버지니아발() 경고… 40곳이 동시에 '플러그를 뽑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1(현지시간)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지난해 2월 버지니아주에서 고압 송전선 결함이 발생하자 약 40개 데이터센터가 동시에 전력망(Grid) 연결을 차단하고 자체 비상 발전기로 전환했다. 이 순간 전력망에서 사라진 부하는 100만 가구 이상에 공급할 수 있는 전력량이었다.
이보다 앞선 20247월에도 유사한 사고로 70여 곳의 데이터센터가 일제히 전력망에서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전력망은 공급과 수요가 실시간으로 정확히 균형을 이뤄야만 안정적으로 작동한다. 공급이 부족하면 정전이 오지만, 수요가 갑작스럽게 사라져 공급이 넘쳐나도 발전기가 과부하로 손상되거나 연쇄 정전이 일어날 수 있다.

PJM 인터커넥션의 마이크 브라이슨 부사장은 WSJ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사고가 국가 비상사태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다""3,000~5,000메가와트(MW) 규모의 수요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면 전력망 제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고 경고했다. PJM은 미국 동부 13개 주의 전력망을 관할하는 북미 최대 전력 계통 운영기관이다.

2030년 버지니아 전력의 57%가 데이터센터… 리스크는 지금부터


오는 2030년 미국 전체 전력 소비의 17%를 데이터센터가 차지할 전망이다. 현재 4~5% 수준에서 불과 5년 만에 4배 가까이 급등하는 셈이다. 버지니아주의 경우 주 전체 전력의 57%를 데이터센터가 소화할 것으로 예측돼 리스크 농도가 가장 짙다.

WSJ 보도에 따르면 전()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 위원인 마크 크리스티는 "수요 측에서 전력망 시스템을 무너뜨릴 수 있는 전례 없는 위협이 등장했다""초대형 전력 소비자인 데이터센터가 늘어날수록 시스템 전체의 취약성도 비례해 커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전력의 양'에서 '전력의 질'로… 에너지 시장판도 바뀐다


이번 사태가 던지는 본질적 메시지는 분명하다. 전력 시장의 경쟁 축이 '얼마나 많이 공급하느냐'에서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하느냐'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데이터센터는 전압이나 주파수가 기준치에서 벗어나면 자동으로 전력망 연결을 차단하고 자체 발전으로 전환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 자동화 시스템이 오히려 전력망 전체를 위협하는 역설이 나타난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전압과 주파수를 24시간 일정하게 유지하는 '기저 부하' 전원이 필수다.

태양광·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날씨에 따라 출력이 들쭉날쭉하다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 반면 원자력 발전은 기상 조건과 무관하게 안정적인 출력을 유지하며, 소형모듈원전(SMR)은 데이터센터 인근에 직접 설치해 송전 손실과 계통 부하를 동시에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업계의 주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도미니언 에너지를 비롯한 미국 주요 전력회사들이 빅테크 기업들과 손잡고 전력망 결함 시에도 데이터센터가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적 보완책을 서둘러 마련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흐름의 반영이다.

WSJ 보도에 따르면 북미전력계통신뢰도공사(NERC)의 마크 로비 수석 부사장은 지난달 열린 컨퍼런스에서 "데이터센터의 급격한 수요 변동은 우리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신규 리스크 중 하나"라며 구글, QTS 데이터센터 등과의 공동 대응을 예고했다.

원전·SMR·전력 설비 3각 패키지… '에너지 동맹' 선점 기회


이번 버지니아 사태는 한국 에너지 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 국면으로 읽힌다.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원전 건설·운영 기술과 함께 초고압 변압기·차단기 등 전력 기기 제조 역량을 동시에 보유한 몇 안 되는 나라다. 업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단순한 해외 사고 사례가 아니라, 한국의 SMR 기술과 계통 제어 솔루션을 패키지로 묶어 수출할 수 있는 실질적인 수요 증거로 작동할 것이라고 분석한다.

국내 전력 업계 관계자는 "데이터센터 유치 경쟁에서 '안정적 전원 확보' 여부가 핵심 입지 조건으로 부상한 만큼, SMR 기반의 독립 전원 공급망과 계통 안정화 기술을 결합한 솔루션 수출은 구체적인 협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AI 데이터센터 산업의 지속 가능성이 전력망의 안정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 이번 버지니아 사태로 공식화됐다. 전기를 얼마나 많이 만드느냐보다 전기를 얼마나 흔들림 없이 공급하느냐가 새 시대의 경쟁력이 됐다. 그 중심에 한국이 설 수 있는 조건은 이미 갖춰져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