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초고령사회가 보여주는 '제2의 인생'
안식년을 맞아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놀란 것은 '80세'가 더 이상 은퇴를 의미하는 나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대학 총장, 기업 경영자, 공무원…. 한 시대를 이끈 사람들이 정년 이후에도 각자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다른 역할을 맡아 사회와 활발히 연결돼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단순히 오래 일한다는 데 있지 않았다. 익숙한 자리에 머무르기보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배우며 인생의 다음 장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번 연재는 일본에서 만난 이러한 시니어들의 삶을 통해 초고령사회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오래 일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오래 배우고, 어떻게 오래 사회와 연결될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첫 번째 주인공은 필자가 교원으로 근무한 일본 가나가와 치과대학의 히라타 유키오(平田幸夫) 전 총장이다. 올해 만 76세인 그는 대학 총장직에서 물러난 뒤 가나가와현 요코스카시에 있는 미도리가오카 여자고등학교 교장으로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대학과 고등학교는 같은 교육기관이지만 교육의 대상도, 운영 방식도, 학교 문화도 전혀 다른 세계다. 더욱이 총장 은퇴를 앞두고 여러 대학과 전문학교로부터 부임 요청을 받았음에도 그는 익숙한 길 대신 가장 낯선 길을 택했다.
이미지 확대보기최근 그를 찾아가 그 이유를 물어봤다. 그는 잠시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대답은 이번 인터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한마디였다.
새로운 일은 또 다른 배움의 시작
총장으로 은퇴를 앞두었을 무렵, 그는 여러 대학과 전문학교 등에서 요직을 제안받았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그대로 이어갈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뜻밖이었다. 지역 여자고등학교의 교장이었다.바로 미도리가오카 여자고등학교다.
"주변에서는 모두 의아해했습니다. 대학 총장이 왜 갑자기 고등학교 교장이 되느냐고요. 저 역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세계였기 때문에 솔직히 두렵기도 했습니다. 제2의 인생만큼은 새로운 일에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그 선택은 어느덧 9년째가 됐다.
이미지 확대보기과거는 미래를 여는 자양분
새로운 학교에 부임했을 때 그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학생도, 교사도, 학교 문화도 대학과는 너무 달랐다. 일종의 컬처 쇼크(문화 충격)였다. 그러나 대학 총장으로 대학교육 개혁을 추진한 경험은 고등학교 교육의 방향을 세우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코로나19 시기에는 공중위생학을 연구한 학자의 경험이 학교의 위기 대응에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그는 말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고 해서 과거를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쌓아온 경험은 반드시 새로운 도전을 떠받치는 힘이 됩니다. 인생에는 결코 헛된 경험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매일이 새로운 학교
교장의 하루는 아침 8시 이전에 시작된다. 오전 7시에 집을 나서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학교에 도착한다. 출퇴근 시간의 제약이 없는 대학교수·총장 시절과는 전혀 다른 생활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저에게는 학교 자체가 새로운 세계였습니다. 매일매일 다양한 문제가 생깁니다. 해결해야 할 일도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씩 해결할 때마다 새로운 성취감을 느낍니다. 그 성취감이 저를 계속 일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76세의 교장인 그에게 학교는 단순히 일터가 아니다. 그에게 학교는 여전히 생생한 배움의 현장이다.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인사
그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을 묻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매일 아침 정문 앞에 서서 학생들에게 인사하는 일입니다."
히라타 교장의 인사는 흔히 생각하는 단순한 예절 교육이 아니다. "제 인사에 밝게 답하는 학생은 학교생활에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인사를 받지 않거나 외면하는 학생은 마음속에 무언가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학생은 반드시 담임교사에게 전달하여 잘 살피도록 합니다."
그에게 아침 인사는 가장 중요한 교육활동이자 학생들의 건강상태를 확인하는 척도가 된다. 어느 날, 그간 교장이 건네는 인사에 별 반응이 없고 무표정한 학생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는 그 순간 말할 수 없는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어쩌다 스누피 무늬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기라도 하면 학생들이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온다. "교장샘, 오늘 정말 귀여워요." 그러면 76세의 교장은 멋쩍은 듯 "어, 그래?" 하며 웃어넘긴다고 한다. "이 나이에 여고생들에게 귀엽다는 말을 듣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건강은 사회와 연결돼 있는 상태
건강이란 '사회와 연결되어 있는 상태'이다. 평생 공중보건학을 연구해온 히라타 교장은 '건강'에 대해서도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건강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운동을 하거나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을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운을 뗀 뒤 1948년 세계보건기구(WHO)가 제시한 건강의 정의를 차분히 설명했다. "WHO는 건강을 단순히 질병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신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모두 양호한 상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가운데 어느 것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진정한 의미의 건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사회적 건강(social well-being)'이라는 관점이었다.
"아무리 몸이 건강하고 정신도 활력이 넘친다고 해도 사회와의 연결을 잃어버린다면 그것은 진정한 건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이고, 자신에게도 사회 속에서 맡은 역할이 있다는 것을 실감할 때 비로소 사회에서도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니어들에게 가능한 한 오래 일을 계속하기를 권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회와 연결을 지속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사회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계속 해 나가는 일입니다. 규칙적으로 일하면 자연스럽게 몸을 움직이게 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사회와의 관계도 이어집니다. 그 결과 신체적 건강과 정신적 건강, 그리고 사회적 건강이 균형 있게 유지되는 것입니다."
잠시 말을 멈춘 그는 덧붙였다. "경제활동을 계속하는 것은 사회의 한 구성원이라는 자부심을 지켜 나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개인에게도 큰 의미가 있지만, 세금을 내고 소비를 통해 사회를 지탱한다는 점에서 국가 전체에도 도움이 됩니다."
그가 말하는 건강은 단순히 오래 사는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와의 연결을 유지하며 자신만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 이번 인터뷰에서 필자는 그것이야말로 초고령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진정한 의미의 건강이라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 히라타 교장은 인터뷰를 마치면서 한국의 시니어들에게도 조용히 우정 어린 메시지를 전했다.
"가능하면 일을 하십시오. 그것도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하십시오. 운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는 '일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일을 할 수 없다면 자원봉사라도 하십시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역할을 가질 때 가장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일'을 이야기했지만, 내가 들은 것은 노동의 가치만이 아니었다. 그의 말 속에는 '역할'과 '배움'이라는 두 단어가 반복해서 숨어 있었다. 대학 총장에서 고등학교 교장이 된 전환은 직업을 바꾼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역할을 배우기로 선택한 결단이었다. 우리는 흔히 노년을 안정과 휴식의 시기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다른 가능성을 보여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용기, 낯선 환경에서 다시 배우는 자세, 그리고 그 배움을 통해 사회와 다시 연결되는 경험. 어쩌면 이것이 초고령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노년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평생학습은 단순히 지식을 쌓는 교육이 아니다. 인생의 전환점에서 새로운 역할을 배우고, 그 역할을 통해 다시 사회와 연결되도록 돕는 과정이다. 사람들의 수명이 길어진 만큼 사회적 역할도 함께 길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앞으로 한국 사회가 준비해야 할 평생학습의 새로운 과제가 아닐까.
이미지 확대보기도쿄=신현정 중부대학교 교수/릿쿄대학교 객원교원
신현정 중부대학교 교수/릿쿄대학교 객원교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