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확대보기경제정책의 역사는 늘 ‘숫자의 진실’과 ‘권력의 유혹’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였다. CPI와 PCE등 물가 지표는 중앙은행의 정책 당국자들에게 북극성과 같다. 북극성이 구름에 가려지거나 왜곡되면 배는 암초로 향할 수밖에 없다.
최근들어 미국 연방준비은행(Fed)을 둘러싸고 통화정책의 새로운 기준선으로 ‘절사평균물가지수(Trimmed Mean Price Index)’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이 중심에 선 인물이 바로 케빈 워시(Kevin Warsh) 연준 의장이다. 그는 기존의 헤드라인(Headline) 물가나 관행적인 근원물가(Core PCE)가 현실 경제를 오판하게 만드는 ‘거친 어림짐작’에 불과하다고 일갈하며, 극단적 변동성을 기계적으로 도려내는 절사평균 지수의 도입을 강력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여기에 대해 시장의 시선이 곱기만 한 것은 아니다. 1970년대 오일쇼크의 파고 속에서 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키워놓고 역사의 죄인이 되었던 아서 번즈(Arthur Burns) 전 연준 의장의 그림자가 이 지점 즈음에서 짙게 겹쳐지기 때문이다. 숫자를 주무르고 지표의 외연을 넓히거나 좁히며 정책적 실수를 은폐하려 했던 역사적 트라우마가 오늘날 케빈 워시의 혁신 드라이브 위로 소름 돋는 평행이론처럼 소환되고 있다. 과연 절사평균물가지수의 도입은 통화정책의 정교함을 더하는 과학적 진화인가, 아니면 또 다른 형태의 세련된 ‘CPI 마사지’에 불과한 것인가.
이 때문에 연준은 전통적으로 변동성이 큰 식료품과 에너지를 통째로 도려낸 ‘근원물가(Core Inflation)’를 보조 지표로 삼아왔다. 문제는 이 방식이 지독한 정보 유실을 초래한다는 점이다. 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뼈저리게 체감하는 장바구니 물가와 에너지 비용을 무조건 통계 밖으로 밀어내다 보니, 중앙은행이 바라보는 경제의 현실과 대중이 생살로 느끼는 고통 사이에 거대한 괴리가 발생했다.
케빈 워시가 주목한 절사평균물가지수는 바로 이 지점의 대안으로 제시된다. 특정 부문을 자의적으로 도려내는 것이 아니라, 매월 발표되는 수백 개 개별 품목의 등락률을 일렬로 세운 뒤 상하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튀어 오른 품목들을 기계적인 비율(예: 상하위 각 8~10%)만큼 잘라내고 남은 중간 품목들의 평균을 구하는 방식이다. 피겨스케이팅이나 리듬체조에서 심사위원들의 최고점과 최저점을 제외하고 채점하는 원리와 같다. 일시적인 노이즈를 필터링하면서도 특정 섹터를 통째로 도려내지 않아 정보의 손실을 최소화한다는 점에서 통계적 정교함이 한 차원 높다는 평가를 받는다.
케빈 워시가 이 지표를 정책의 중심에 두려는 이유는 명확하다. 중앙은행이 단기적인 충격에 휘둘려 피벗(통화정책 전환) 타이밍을 놓치거나,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내 정책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실수를 원천 차단하겠다는 의지다. 워시는 평소 연준이 의존하는 통계 모형들이 현실 경제의 방대한 흐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특히 단기 관세 정책이나 공급망 교란, 지정학적 리스크가 빈번한 현대 글로벌 경제에서 헤드라인 물가만 쳐다보고 긴축을 고집하다가는 멀쩡한 실물 경제를 침체의 수렁으로 밀어 넣기 십상이다.
절사평균 지수는 가격 변동의 기조적 흐름, 즉 ‘진짜 인플레이션 압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가장 가감 없이 보여주는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다. 방대한 민간 가격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소화하는 빅데이터 시대에, 기계적 절사 기법을 통해 물가의 본질을 꿰뚫어 보겠다는 워시의 구상은 일견 매우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혁신으로 보인다.
그 결과는 처참했다. 통제 시기를 놓친 인플레이션 불길은 잡을 수 없이 번졌고, 미국 경제는 사상 최악의 ‘스태그플레이션’과 두 자릿수 물가 폭등이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번즈는 ‘가장 무능하고 비겁했던 연준 의장’이라는 오명을 안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오늘날 시장의 일각에서 워시의 절사평균 지수 도입 시도를 향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헤드라인 물가가 여전히 높게 치솟거나 민생 경제가 고물가에 신음하고 있을 때, 중앙은행이 “새로운 지표(절사평균)로 보니 인플레이션은 이미 통제 범위 내에 있다”며 금리 인하를 정당화하거나 긴축 기조를 조기에 완화하는 ‘면죄부’로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다. 국민들은 장바구니 앞에서 한숨을 쉬는데, 정책 당국자들만 입맛에 맞게 가공된 통계 수치를 보며 “기조적 물가는 안정적”이라고 자화자찬하는 아서 번즈의 재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경계심이다.
절사평균물가지수 자체는 통계학적으로 훌륭한 도구다. 일시적 충격을 걸러내고 경제의 기조적 흐름을 읽어내는 데 기존의 근원물가보다 우수한 점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지표는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실물 경제의 거울이어야 한다. 케빈 워시가 추진하는 통화정책의 과학화가 진정한 신뢰를 얻으려면, 새로운 통계 기법이 국민의 체감 물가를 축소하고 완화적 정책을 합리화하는 ‘세련된 마사지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지표를 바꿀 수는 있어도 인플레이션이라는 냉혹한 현실을 지워낼 수는 없다. 아서 번즈가 남긴 역사적 교훈은 명백하다. 통화당국이 현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자신들의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 통계의 마술에 기 예술을 부리는 순간, 경제는 다시 한번 걷잡을 수 없는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워시의 새로운 실험이 또 다른 ‘번즈의 비극’이 아니라 진정한 통화정책의 진화로 기록되려면, 숫자의 마술보다 민생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철저한 냉철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