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장 김정화의 전통염색이야기(48)] 자색(Ⅴ)
십 수 년 전, 자초보라로 농담(濃淡)을 달리하여 물들인 옷을 입고 독일과 이태리를 다녀온 적이 있다. 동행을 한 교포 김 선생이 독일인들은 마주 걸어오는 사람에게 결례가 될까 먼눈으로만 살짝 본다고 말했다.그랬던 김 선생이 여행길 내내 스쳐 지나는 사람마다 필자를 뒤돌아본다며 의아해 했다. “내가 너무나 동양적인 사람이라 그래”라고 지나쳤다. 이태리를 갔다. 이태리인들은 독일인들과 정반대였다. 한참 떨어진 곳에서부터 싱글싱글 눈인사를 하더니 필자를 잡고 “이 옷 네가 만들었냐?”, 그리고 카페에선 아예 옆자리로 와서 “이 천은 어디에서 생산된 거냐? 색 느낌이 특이하고 특별해!”
그들의 정확한 질문에 대충대답하면 아니 될 듯하여 “이것은 한국의 전통염색이고, 자초라는 풀의 뿌리에서 나온 염료로 60번 물들인 실크다”라고 했더니 그 커다란 눈이 마치 구슬처럼 금방 굴러 나올 듯했다. 만날 때마다 필자에게 저리 못생겼으면서도 지가 못생긴 줄을 모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던 김 선생이, 그 못생긴 필자가 만든 지치보라 덕에 우쭐하는 꼴을 보고 배를 잡았던 기억이 난다.
알코올 추출법을 소개한 앞글은 필자가 채록을 다닐 때 들었던 이야기로 지금에 와서도 가장 손쉽고 효율적인 방법이다. 이 색소추출법으로 색소를 얻는 방법은 진도홍주가 그 대표적인 예로, 소량의 자초를 알코올에 담그면 붉은 빛으로 곱게 우러나서 발그레한 색이 된다.
『상방정례』, 『계림지』, 『규합총서』, 『임원경제지』 등에 자초염색법이 전해지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은 인터넷 검색으로 국역이 된 염색법 전문을 손쉽게 볼 수 있으므로 이 글에서는 필자의 경험을 적고자 한다. 옛글에 적혀있는 방법대로 자초염색을 하면 색이 잘 들지 않는다. 생 자초 뿌리를 가볍게 씻어 미지근한 물에 몇 시간 우려내어 염색하면 그런대로 물이 드는 듯하지만 염료에서 꺼내면 색이 곱지 않다. 적색이나 검정색 등 일반적인 염료는 정련한 직물을 별다른 처리 없이 염색을 하고 매염처리를 하나, 자초 자색만은 매염제로 전처리를 하지 않으면 염액의 농도가 짙어도 직물에 잘 스며들지 않는다.
자초염색을 할 직물은 반드시 먼저 명반으로 매염을 하고 난 뒤 염색을 해야 색이 들여진다. 즉 선매염법(先媒染)이 적용되는 것이다. 여러 번 염색하는 직물은 매염처리를 하고 다시 덧 염색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두 번째부터는 자동적으로 선매염 상태가 된다. 명반은 알미늄 화합물인데 옛 기록들에 언급된 노린재나무나 동백나무의 재를 쓴다는 것도 재속에 들어있는 알루미늄 성분을 이용한 것이다.
염색횟수만큼 명반매염 횟수도 늘어나므로 처음 몇 차례 이후에는 명반의 량을 줄여서 매염처리를 하고 염색을 끝낸 다음에는 많은 물에 푹 담가 오랜 시간 우려내어 헹군다. 아무튼 선매염을 하지 않은 채로 자초 물을 들이면 언제나 실망스럽지만 선매염을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염색법이다. 특히 「개오기」를 할 만큼 염색된 어미 직물은 색상이 깊고 진하며, 개오기 법으로 염색된 맑고 밝은 분홍, 연보라 빛의 베는 견뢰도가 뛰어나서 「어미와 개오기」의 배색느낌이 아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