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HD현대, 'MASGA' 앞세워 美 필라델피아 조선소 등 인수...기술·인력 전방위 지원
美 의회, '동맹국 선박 등록제' 추진...대중국 견제 위한 안보 협력 급물살
美 의회, '동맹국 선박 등록제' 추진...대중국 견제 위한 안보 협력 급물살

◇ '빨간 모자'로 뚫은 무역협상…정상회담까지 이어져
지난 7월 교착상태에 빠졌던 한·미 무역 협상장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한국 협상단이 내민 '빨간 야구모자'였다. 대한항공 편으로 긴급 공수된 모자에는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Shipbuilding Great Again)'라는 문구와 함께 성조기와 태극기가 새겨져 있었다.
상자 속 모자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중국에 크게 뒤처진 미국 조선업을 부활시키는 데 한국이 1500억 달러(약 207조 원)를 투자하겠다는 파격적인 약속을 담은 상징물이었다. 미 상무부의 하워드 러트닉 장관은 "훌륭한 아이디어"라며 즉각 화답했고, 양측은 조선과 자동차 분야를 중심으로 한 상호관세율 인하 등을 담은 무역 협정을 신속하게 체결했다. 이 합의에는 한국이 미국산 에너지 1000억 달러(약 138조 원)를 구매하기로 한 약속도 포함했다. 이로써 트럼프 행정부가 줄곧 제기해온 무역흑자 불만을 '투자와 일자리 제공'으로 푸는 효과를 거뒀다. 이 협상 타결이 6월 초 취임한 이재명 대통령의 백악관 초청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외교가의 중론이다. 기획재정부의 구윤철 장관 역시 "MASGA 계획이 관세 협정 타결에 가장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한국 정부가 약속한 1500억 달러는 미국 내 조선소 인수와 신설, 인력 양성, 공급망 재편, 선박 수리 등 광범위한 분야에 투입될 전망이다.
◇ 미·중 패권 경쟁이 부른 'K-조선'
미국이 한국에 손을 내민 배경에는 자국 조선업의 처참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영국 조선·해운 시황 분석기관 클락슨리서치에 따르면 세계 상업용 선박 건조 시장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 아래다. 반면 중국은 약 60%를 장악하고 있으며, 한국은 22%로 2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러한 격차는 기술력과 생산성에서 비롯된다. 한국이 액화천연가스(LNG)운반선·해양플랜트 등 고부가가치 선박 기술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반면, 미국의 조선소는 대부분 군수용이거나 유지보수 전용으로 운영한다. 세계 최대 조선소인 HD현대중공업은 미 해군 구축함을 미국 현지보다 약 절반의 비용과 3분의 2 시간만으로 건조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이에 한국 기업들은 미국 조선소를 직접 인수하거나 기술을 이전하는 방식으로 활로를 찾고 있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약 1억 달러(약 1385억 원)에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인수하며 한국 기업 최초로 미국 선박 생산 기지를 확보했다. 이를 통해 앞으로 미 해군의 전·후방 조선 사업 참여까지 넘보고 있다. HD현대중공업 역시 미국 조선소 인수를 검토하는 한편, 최근 미국 주요 군용·상업용 조선업체들에 역량 구축을 위한 자문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 군함을 건조하지 않는 삼성중공업 또한 미 해군 비전투함 정비 시장 진출을 검토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의 정우만 특수선 기획 담당 상무는 "한국은 미국이 학습과정에서 낭비할 수 있는 시행착오를 줄여줌으로써 그 기간을 단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서 "우리는 제공할 것이 많다"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미국이 조선업 부흥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단순한 산업 경쟁력을 넘어 군사·안보 필요성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특히 대만을 둘러싼 미·중 갈등이 고조되면서 해군력의 중요성은 그 어느 때보다 커졌다.
지금 중국 해군 함대 규모는 미국을 앞질렀으며 격차는 더 벌어질 전망이다. 미 국방부가 이르면 2027년 중국의 대만 침공 가능성을 거론하는 가운데, 미 해군은 생산 지연과 노후 함정 퇴역으로 전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때 동맹국의 조선소 활용은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서울 아산정책연구원의 피터 리 연구위원은 미군 함정의 유지·보수·정비(MRO) 작업을 인도·태평양 지역의 동맹국 조선소로 이전하면 미국 본토 조선소는 신규 함정 건조에 집중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대만 분쟁 발생 때 동맹국 조선소는 손상된 함정을 신속하게 수리할 수 있는 거점이 될 것"이라면서 "이러한 협력은 중국의 반(反)접근/지역거부(A2/AD) 전략에 대응하는 데에도 효과 있는 카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존스법 등 법적 장벽과 국내 산업 공동화 우려
다만 한·미 조선 협력이 본궤도에 오르기까지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가장 큰 장애물은 '존스법(Jones Act)'과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규정이다. 이들 법안은 미국 영해 내 운항 선박의 미국 건조를 의무화하고, 외국 기업의 군수·상업 조선소 직접 참여를 원칙적으로 금지한다. 이 때문에 HD현대중공업이 울산에서 건조한 군함을 미국에 직접 수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최근 미 의회에서 이를 완화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하와이와 괌을 지역구로 둔 에드 케이스, 제임스 모일런 하원의원은 '해외 동맹국 선박 등록제(Foreign Ally Shipping Registry)'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한국·일본 등 핵심 동맹국을 특별 등록국으로 지정해 미국 선박 건조와 수리에 참여할 길을 터주자는 것이 뼈대다. 이 법안의 통과 여부가 MASGA 구상의 성패를 가를 핵심 변수다.
동시에 위험 요인도 있다. 국내에서는 울산 등 조선업 본거지의 투자가 위축되고 '기술과 일자리의 역수출'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첨단 LNG와 군함 관련 기술이 미국으로 넘어갈 위험도 있다. 중국 관영매체 글로벌타임스 등이 한국의 전략적 자율성 위축을 경고하며 견제에 나선 것도 부담이다.
◇ 산업·경제 안보 동맹으로의 확장
MASGA 계획의 미래는 법적·제도적 장애물 해소에 달려 있다. '해외 동맹국 선박 등록제'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한국 조선업계의 미국 시장 진출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과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MASGA를 핵심 성과로 내세울 가능성이 크다.
앞으로 한국 기업들은 미국 조선소 추가 인수나 합작을 통해 방산·에너지·해양플랜트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는 '일괄 계약'을 추진할 수 있다. 그러나 국내 산업계와 노조의 반발, 미·중 사이에서 전략적 균형을 잡아야 하는 외교상 과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MASGA는 한미동맹이 전통 군사·안보를 넘어 산업·경제 안보 동맹으로 뻗어나가는 상징 사업이다. 한국은 트럼프 행정부의 거래 중심 동맹관에 대응해 조선업이라는 '최강의 카드'로 동맹의 이익을 확보하려는 전략을 쓰고 있다. 이 구상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을지는 앞으로 법적 제약 완화와 미·중 관계라는 거대한 파도를 어떻게 넘느냐에 달려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