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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방어선, 다시 세워야 할 안전의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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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방어선, 다시 세워야 할 안전의 성벽

정상민 (사)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장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왼쪽 둘째부터)과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9월 서울 용산구 청년주택 신축공사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왼쪽 둘째부터)과 김윤덕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9월 서울 용산구 청년주택 신축공사 현장 점검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새벽 6시, 한 건설 현장에 일용직 노동자 김 씨가 출근한다. 전날 급하게 연락받고 처음 오는 현장이다. 간단한 서류 작성 후 15분짜리 안전교육 영상을 본다.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 동료는 영상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고개만 끄덕인다. 오전 9시, 작업이 시작된다. 김 씨는 20m 높이 비계 위에서 용접 작업을 한다. 안전난간은 곳곳이 헐겁고, 안전모는 낡아 턱끈이 헐거워졌지만 교체해 달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2025년 대한민국, 어느 건설 현장의 평범한 풍경이다.

올해는 우리 산업 현장에 안전관리의 전환점이자 한계가 동시에 드러난 해였다.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가 선정한 '2025 중대재해·안전 7대 뉴스'는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직면한 구조적 문제의 단면들이다.

가장 취약한 곳에서 먼저 무너지는 안전

지난 4월 아리셀 화성공장 리튬배터리 폭발로 23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망자 대부분이 외국인 하청 노동자였다. 비상구조차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현장, 언어 장벽으로 인한 안전교육 부재, 신기술 위험에 대한 대응 매뉴얼 부족이 참사를 키웠다. 고립된 사건이 아니다. 2024~2025년 통계를 보면 하청·이주 노동자 사망 비중이 뚜렷하게 증가했다.
국정감사에서 드러난 국내 10대 건설사의 최근 5년간 113명 사망 통계는 충격적이다. 연평균 22.6명, 올해만 16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들 대부분이 하청·일용직 노동자다. 대형 건설사들은 공사 발주와 관리·감독에만 치중할 뿐 실제 위험 작업을 수행하는 이들의 안전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진다.

글로벌 공급망 시대를 살면서도 우리 곁에서 함께 일하는 이들의 안전권은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다. 기업들은 위험을 하도급 구조로 떠넘기고, 정부 통계는 이들의 존재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복잡한 하도급 구조는 안전 책임을 희석시키고, 일용직 노동자들은 충분한 교육도 받지 못한 채 위험에 노출된다.

원청을 무죄로 하고 하청에만 책임을 묻는 판결이 늘면서 책임 구조의 모호성이 가중되고 있다. 원청은 하청의 안전관리 책임을 강조하고, 하청은 원청의 관리·감독 소홀을 문제 삼는 사이, 현장의 안전 투자와 교육은 뒷전으로 밀린다. 사회적 약자의 안전은 산업안전의 최후 방어선이다. 안전하지 못한 현장은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새로운 위협과 낡은 대응 사이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4년째, 법 적용을 둘러싼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울산 크레인 사고와 대구 추락 사고에서는 경영진이 실형을 받았다. 경영진이 현장 위험 요인을 직접 확인하지 않고 예방조치를 소홀히 하면 법이 엄격히 적용된다는 신호다. 그러나 동시에 '예측 불가능한 사고'를 이유로 한 무죄 판결도 속출한다. 같은 유형의 사고인데도 법원마다 다른 판단을 내리는 일이 늘고 있다.

'예견 가능성'과 '인과관계'에 대한 해석이 판례마다 달라 현장은 혼란스럽다. 기업은 예측 가능한 안전 투자가 어렵고, 노동자는 법의 보호를 신뢰하기 힘들어진다. 법적 책임의 불명확성은 법의 실효성을 약화시킨다. 현장에 맞는 구체적 지침과 명확한 적용 기준, 작업 단계별·위험도별로 세분화된 책임 매뉴얼이 시급하다.

올여름 폭염 속에서 발생한 온열질환 사망 사건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첫 유죄 판결이 나왔다. 기존의 기계적 사고나 추락 사고와 달리 환경 요인에 의한 건강 피해도 법적 책임 대상임을 명확히 한 획기적 판례다. 기후변화로 인한 극한 날씨가 일상화되면서 야외 작업장의 위험도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건설·조선·철강 등 주요 산업 분야에서 온열질환 위험이 높아지고 있다. 기존의 안전관리 패러다임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하다.

단순히 작업시간을 조정하는 수준을 넘어 실시간 건강상태 체크, 충분한 휴식 공간 확보, 개인보호구 개선 등 종합적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기후 위기는 노동 현장의 새로운 위험 요소이며, 건강 모니터링과 냉방·휴식 체계 등 기후 대응 안전관리의 제도화가 절실하다.

긍정적인 변화도 있었다. 고용노동부가 올해부터 중대재해 발생 사실을 정기 공개하기 시작했다. 정보공개는 기업의 자정작용을 촉진하는 강력한 정책 도구다. 실제로 중대재해 발생 사실이 공개되면서 기업들이 평판 관리 차원에서라도 안전관리에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국회에서도 사업주 처벌 강화, 작업중지권 확대, 면책 규정 신설 등을 담은 다양한 개정안이 발의되며 안전보건 정책의 대전환이 예고됐다.

다만 단순한 처벌 위주의 정책보다는 예방과 지원을 병행하는 정책 방향이 필요하다. 법은 현장의 현실을 반영해야 하며, 노사와 전문가 의견을 폭넓게 수렴하는 신중한 입법 과정이 필요하다. 현장 목소리를 반영한 제도적 피드백 체계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

올해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것은 명확하다. 전통적인 기계적 사고 예방을 넘어 기후변화, 신기술 위험, 다문화 노동환경 등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안전관리 패러다임 전환이 시급하다. 과거 사고 발생 후 대응하는 사후적 안전관리에서 위험을 미리 예측하고 예방하는 선제적 안전관리로 전환해야 한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한 스마트 안전관리 시스템 도입이 필요하다.

산업 안전사고가 해당 기업뿐 아니라 공급망 전체, 나아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면서 안전을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가치로 인식해야 한다. ESG 경영과 지속가능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안전관리는 법적 의무를 넘어 기업 경쟁력의 핵심 요소다.

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는 매년 말 '중대재해·안전 7대 뉴스'를 정례 발표해 산업계, 정부, 시민사회가 안전의 교훈과 과제를 공유하는 소통 창구 역할을 하겠다. 단순한 사건 나열을 넘어 심층 분석과 정책 제언을 강화해 안전 개선에 기여할 것이다.

2025년은 안전보건 제도의 정착과 한계가 동시에 나타난 해였다. 이제 반복되는 비극을 교훈으로 삼아 진정한 변화를 만들 때다. 새벽 6시 출근하는 김 씨가 저녁에 무사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현장, 소통 언어가 다른 동료도 위험을 인지하고 대응할 수 있는 현장을 조성하는 것이 과제다. 변화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특히 취약한 이들의 안전이 보장될 때 우리 모두가 안전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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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민 (사)대한중대재해예방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