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뚫린 대러 제재… 한국산 정밀기계, 러시아 미사일 공장서 가동

글로벌이코노믹

뚫린 대러 제재… 한국산 정밀기계, 러시아 미사일 공장서 가동

370만 달러 규모 ‘메이드 인 코리아’ 장비, 제재 피해 우회 반입
드론·미사일 부품 제조용… 모스크바 박람회서 버젓이 홍보 ‘충격’
정부 ‘상황허가’ 강화에도 구멍… “최종사용자 확인제도 보완해야”
한국 정부가 대러시아 수출 통제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러시아 방위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한국산 첨단 정밀기계가 가동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미지=GPT-4o이미지 확대보기
한국 정부가 대러시아 수출 통제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러시아 방위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한국산 첨단 정밀기계가 가동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미지=GPT-4o
한국 정부가 대러시아 수출 통제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러시아 방위산업 현장에서는 여전히 한국산 첨단 정밀기계가 가동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서방의 제재망을 피해 중국과 튀르키예 등 제3국을 거치는, 이른바 ‘무역 세탁’을 통해 러시아 군수공장으로 흘러 들어간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유나이티드24미디어(United24 Media)는 24일(현지 시각) 우크라이나 경제안보위원회(ESCU) 보고서를 인용해 "2024년부터 2025년 사이 370만 달러(약 54억 원) 상당의 한국산 고정밀 제조 장비가 러시아로 유입됐다"고 보도했다. 이 장비들은 우크라이나를 공격하는 미사일과 드론 부품을 깎는 데 쓰일 수 있어 파장이 예상된다.

이번에 적발된 품목은 주로 컴퓨터수치제어(CNC) 공작기계와 정밀 절삭공구다. 이는 단순한 산업용 장비를 넘어 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이중 용도(Dual-use)’ 품목으로 분류된다. 버크셔 해서웨이가 소유한 한국 자회사가 생산한 나사산 가공·드릴링·밀링 공구(219만 달러), 중개업체를 통해 공급된 절단 장비 및 부품(131만 달러), 한국 스닥 상장사가 제조한 수평 선반(21만1000달러 등이 포함됐다.

고정밀 절삭공구는 포병 포신이나 미사일, 드론 탄피에 쓰이는 경질 합금을 가공하는 데 필수적이다. CNC 기계는 항공우주 부품과 미사일 엔진 하우징, 샤프트, 노즐 등 마이크로 단위의 정밀도가 요구되는 금속 부품을 깎아내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설비다.
ESCU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 장비들은 중국·튀르키예·인도·우즈베키스탄·리투아니아·태국 등 복잡한 환적(換積) 경로를 거쳐 러시아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러시아로 바로 가는 직수출길은 막혔지만, 중개무역을 가장한 ‘세탁’ 과정을 거쳐 제재를 무력화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레나 유르첸코 ESCU 분석·조사 책임자는 "문제는 비밀 배송에 그치지 않는다"면서 "2022년부터 사실상 수출이 금지된 한국 브랜드 제품들이 모스크바에서 열린 ‘메탈로오브라보트카-2025(Metalloobrabotka-2025)’ 전시회에서 공개 광고하고 홍보한다는 점이 더 심각하다"고 꼬집었다. 메탈로오브라보트카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매년 열리는 동유럽·독립국가연합(CIS) 최대 규모의 공작기계 및 금속가공 박람회로, 러시아 산업통상부의 후원을 받아 전 세계 공작기계 제조사들이 참여한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 주요 기업들이 철수했지만, 중국과 일부 제3국 중개상을 통해 여전히 서방·한국의 기술이 소개되고 있어 제재 회피의 온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 방산업계 관계자는 “러시아가 웃돈을 줘가며 한국산 기계를 찾는 이유는 성능과 내구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라면서 “결국 한국 기술이 우크라이나를 겨냥한 러시아 무기 제조에 기여하는 역설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완제품 수출 통제를 넘어 제3국으로 나가는 물량에 대한 ‘최종사용자(End-user)’ 확인 절차를 대폭 강화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관세청은 이러한 우회 수출을 차단하기 위해 최근 ‘우려 거래자(Entity List)’ 정보를 미국·유럽연합(EU) 등 우방국과 공유하고, 단속 품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정비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 9월 대러시아 상황허가 대상 품목을 기존 1159개에서 1402개로 대폭 확대했다. 여기에는 이번에 문제가 된 금속 절삭가공 기계와 공작기계 부품 등이 포함됐다. 한 통상 분야 전문가는 “단순히 품목 리스트를 늘리는 것을 넘어 우회 수출이 의심되는 국가에 대해서는 사후 심사가 아닌 사전 ‘최종사용자 확인서’ 제출 요건을 강화하는 등 실효성 있는 보완책이 현장에 적용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