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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日 무라타, 獨서 中 맥센드 제소…반도체 특허전 '유럽 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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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日 무라타, 獨서 中 맥센드 제소…반도체 특허전 '유럽 확전'

배상금보다 '판매 금지' 족쇄 전략…獨 법망으로 中 굴기 견제
中 '특허 무효화'에 日 맞불…기술독립 vs 수성 '강대강' 충돌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글로벌 무선주파수(RF) 프론트엔드 시장의 패권국 일본이 칼을 빼 들었다. 일본 전자부품의 자존심 무라타제작소(Murata Manufacturing)가 중국 RF 시장의 선두주자 맥센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Maxscend Microelectronics, 이하 맥센드)를 상대로 독일 법원에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이는 단순한 기업 간 법적 분쟁을 넘어선다. 미·중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 급격히 팽창하는 중국 반도체 공급망을 견제하려는 일본 업계의 위기감이 '유럽'이라는 제3의 전장으로 확전된 상징적 사건이다. 업계는 이번 소송을 일본이 주도해 온 RF 기술 장벽을 넘어서려는 중국의 '창'과, 이를 저지하려는 일본의 '방패'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배상' 아닌 '봉쇄'…뮌헨 승부수


25일(현지 시각) 디지타임스 등 외신과 업계에 따르면 무라타는 독일 뮌헨 지방법원에 맥센드 본사와 홍콩 자회사(맥센드 테크놀로지)를 상대로 RF 필터 특허 침해 소송을 냈다. 청구 금액은 약 100만 유로(약 16억 9000만 원). 양사의 연간 매출 규모를 감안하면 미미한 액수다.
전문가들은 '금액'이 아닌 '장소'와 '의도'에 주목한다. 무라타가 선택한 독일은 유럽 내 특허 소송의 허브다. 이곳 판결은 유럽연합(EU) 전역에 막강한 파급력을 미친다. 반도체 시장 분석가들은 무라타의 이번 소송이 금전적 보상보다는 유럽의 엄격한 지식재산권(IP) 보호 법제를 활용해 중국 경쟁사의 성장을 구조적으로 가로막겠다는 '전략적 봉쇄' 조치라고 입을 모은다.

맥센드로 대표되는 중국 RF 기업들이 내수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로 뻗어나가는 길목을 유럽에서부터 차단하겠다는 계산이다. 이는 그동안 일본, 미국, 한국 기업들이 독식해 온 고부가가치 RF 프론트엔드 시장에서 중국의 기술 추격이 '무시할 수 없는 위협' 수준에 도달했음을 방증한다.

中 '안방 판정'에 日 '다중 전선' 맞대응


이번 독일 소송은 갑작스러운 도발이 아니다. 양사는 2024년부터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았다. 선공은 후발주자인 맥센드가 날렸다. 맥센드는 2024년 무라타가 보유한 핵심 특허인 '박막 SAW(표면탄성파) 필터용 POI(Piezo on Insulator) 기판 기술'의 유효성에 이의를 제기하며 정면 승부를 걸었다. 해당 특허는 중국 제조사들이 하이엔드 필터 시장에 진입하는 것을 막는 핵심 진입장벽이었다.

중국 당국은 자국 기업의 손을 들어줬다. 지난 2025년 1월, 중국 국가지식산권국(CNIPA)은 무라타의 해당 특허에 대해 '청구항 전면 무효' 결정을 내렸다. 이는 맥센드의 독자 기술인 'MAX-SAW'가 법적 리스크 없이 시장을 잠식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결정적 사건이었다. 중국 RF 기업들이 더 이상 해외 특허 공세에 당하고만 있지 않고 반격할 힘을 갖췄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수세에 몰린 무라타는 즉각 '방어적 공격' 태세로 전환했다. 논란이 된 특허 범위를 축소 조정하는 한편, 중국과 한국 법원에도 소송을 제기하며 전선을 다변화했다. 이번 독일 소송은 이러한 '다중 전선(Multi-front)' 전략의 정점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무라타의 행보에 대해 "일본 공급망 전체가 중국의 RF 기술 굴기를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팹라이트' 무장 中, 기술 독립 가속


무라타는 한때 전 세계 SAW 필터 시장의 절반을 호령하던 절대 강자였다. 그러나 시장 판도는 급변했다. 샤오미, 오포, 비보 등 중국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국산 부품' 채택 비율을 공격적으로 늘리면서 무라타의 점유율은 잠식당하고 있다.

특히 맥센드의 행보는 매섭다. 이들은 단순한 설계를 넘어 제조 역량까지 확보하는 '수직 계열화'에 사활을 걸고 있다. 맥센드는 최근 '팹라이트(Fab-Lite)' 모델로의 전환을 가속화하며, '사인 마이크로(Sine Micro)' 프로젝트를 통해 6인치 필터 웨이퍼 제조 시설을 직접 구축하고 있다.

이는 외부 파운드리에 의존하지 않고 설계부터 생산까지 독자 생태계를 구축하겠다는 의지다. 분석가들은 이러한 제조 역량 확보가 맥센드로 하여금 중저가 시장을 넘어 프리미엄 스마트폰 플랫폼 시장까지 진격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라고 평가한다. 특허 분쟁이 격화되더라도 자체 생산 능력을 통해 공급망 리스크를 최소화하겠다는 전략적 포석이 깔려 있다.

미·일 주도 RF 시장, 판도 변화 예고


전선은 맥센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선로드 일렉트로닉스, 숄더 일렉트로닉스 등 여타 중국 부품사들도 최근 외국 기업들로부터 연이어 특허 소송을 당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R&D 투자를 늘리고 '공급망 독립(Independence)'을 추진하면서 발생하는 필연적인 충돌이다.

실제로 맥센드는 2024년 매출의 22% 이상을 R&D에 쏟아부었다. 이는 중국 반도체 섹터 전반에 흐르는 기류와 일치한다.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기술 격차를 지우고, 특허 장벽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다.

전문가들은 이번 독일 소송이 단기적으로는 맥센드의 해외 시장 확장에 제동을 걸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특허 소송 리스크는 고객사들의 부품 채택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기적 관점에서의 시장 재편은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중국 기업들이 기술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하고 체력을 키워감에 따라,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미국과 일본 기업들의 RF 시장 독점 체제는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 독일 소송전은 그 거대한 지각변동의 서막일 뿐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