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NSS, "무역적자는 안보 위협"… 동맹국에 '제조업 이식' 강요하는 신중상주의 공식화
조선·전력기기 '슈퍼사이클' vs 반도체·자동차 '생산기지 이전'… 극명하게 엇갈린 산업 기상도
조선·전력기기 '슈퍼사이클' vs 반도체·자동차 '생산기지 이전'… 극명하게 엇갈린 산업 기상도
이미지 확대보기지난 5일(현지 시각) 백악관이 발표한 NSS 보고서는 한국 경제에 '3500억 달러'(약 514조 원)라는 천문학적인 투자 청구서를 내미는 동시에 '핵추진 잠수함'과 '소형모듈원전(SMR)'이라는 전례 없는 전략적 기회를 함께 제시했다. 이는 한국의 주력 산업 지형도를 송두리째 뒤흔들 '거대한 실험'의 서막으로 평가받는다.
'안보 비용' 3500억 달러…환율 1450원 시대의 '그림자'
트럼프 2.0 NSS의 핵심은 '경제 재산업화(Re-industrialization)'다. 보고서는 미국의 무역적자를 단순한 경제 수치가 아닌 '국가 안보의 구멍'으로 규정했다. 이는 지난 10월 한·미 양국이 타결한 통상 협상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당시 한국 정부와 재계는 무역확장법 232조에 따른 관세 부담을 완화하고 주요 품목 관세율을 15%로 확정받는 대가로 향후 5년간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를 약속했다.
재계와 금융권 전문가들은 이번 합의를 '비용과 편익이 혼재된 고차방정식'으로 해석한다. 시장에서는 "3500억 달러는 단순한 기업 투자가 아니라 한국의 제조업 역량을 미국 본토로 이식하는 거대한 자본 이동"이라면서 "이는 관세 장벽을 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나 국내 투자 여력을 갉아먹는 '구축 효과(crowding out effect)'를 유발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외환시장의 파고도 높다. 대규모 투자자금이 달러로 환전돼 미국으로 빠져나가면서 원·달러 환율은 심리적 저지선인 1400원을 넘어 12월 중순 1450원을 돌파했다. 이는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고 수준이다. 한국은행의 한 관계자는 "미 재무부가 이번 협상에서 '환율 조항'을 근거로 외환시장 개입을 강력히 견제하고 있어 당국으로서도 환율 방어와 투자 이행 사이에서 정책적 딜레마가 깊다"고 토로했다.
조선·원전 '르네상스'…"美 안보 공백, 한국이 채운다"
트럼프 대통령이 주창한 '미국 조선업 재건(MASGA)'과 '에너지 패권' 정책은 한국 기업들에 '날개'를 달아줬다. 쇠락한 미국의 조선업과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감당할 파트너로 한국이 낙점됐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업계는 미 해군 함정의 유지·보수·정비(MRO) 시장 진출을 넘어 전략적 기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한화그룹은 2024년 12월 미국 필라델피아 소재 필리조선소를 1억 달러(약 1450억 원)에 인수하며 미국 조선시장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이 조선소는 미 해군의 함정 유지·보수 사업의 핵심 거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방산업계에서는 "미국은 현재 버지니아급 핵잠수함의 건조 지연으로 대중국 억제력에 공백이 생긴 상황"이라면서 "NSS에 명시된 '동맹국과의 방산 통합'은 한국의 조선·방산 역량 활용을 의미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0월 30일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를 전격 승인했다. 다만 당초 트럼프 대통령이 필리조선소에서 건조한다고 밝혔으나 이후 한국 정부는 국내 건조 방침을 분명히 했다.
반도체·배터리 '경고등'…기술 유출과 생산기지 이전 우려
반면 한국 경제의 버팀목인 반도체와 배터리 산업은 '생산기지 이전'의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미국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조건으로 요구하는 '가드레일(안전장치)' 조항과 기밀 정보 공유 요구가 거세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 상무부는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수율(Yield) 등 민감한 공정 데이터 제출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반도체산업협회(SIA)와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이 공동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32년까지 한국의 10나노 이하 첨단 반도체 생산 비중이 현재 31%에서 크게 감소하는 반면, 미국은 0%에서 28%로 급증할 것으로 전망된다.
업계에서는 "미국이 한국 기업을 유치하는 것은 단순한 생산 시설 확보를 넘어 기술 주도권(Tech Hegemony)을 완전히 가져가겠다는 의도"라면서 "국내에는 연구개발(R&D) 기능만 남고 생산 기반이 이전되면 양질의 일자리 감소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디지털 주권의 위기…"데이터 빗장 풀어라" 압박 거세
NSS는 디지털 통상 분야에서도 '미국 우선주의'를 명확히 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한국의 정밀 지도 데이터 반출 규제와 망 사용료 부과 움직임을 '무역 장벽'으로 지목하며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IT 업계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국내 네이버·카카오 등 플랫폼 기업들은 미국의 거대 빅테크 기업들이 한국의 데이터를 제한 없이 활용할 경우, 한국의 독자적인 AI 생태계인 '소버린 AI(Sovereign AI)' 구축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시장에서는 "데이터는 21세기 원유이자 AI 시대의 안보 자산"이라며 "미국의 요구에 따라 데이터 보호 장치를 해제하면 한국은 미국 빅테크의 '데이터 공급 기지'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전문가 제언…"투자를 인질이 아닌 '전략적 무기'로 삼아야"
통상·경제 전문가들은 트럼프 2.0 시대의 파고를 넘기 위해 수동적인 방어를 넘어선 능동적인 '지렛대 전략'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507조 원의 투자를 단순한 시장 진입 비용이 아니라 미국 공급망을 장악하는 무기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장에서는 "미국 내 공장을 짓더라도 핵심 공정의 블랙박스와 원천기술은 한국 본사(Mother Factory)가 통제하는 구조를 확립해야 한다"며 "미국이 한국 기업 없이는 반도체나 배터리를 원활하게 생산할 수 없는 '상호 의존적 구조'를 만들어 협상력을 높여야 한다"고 제언한다.
또한 데이터 주권 문제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연대가 해법으로 제시된다. 통상 전문가들은 "유럽연합(EU) 등과 연대해 안보와 개인정보 보호를 명분으로 미국의 일방적인 데이터 개방 압박에 대응할 논리를 개발해야 한다"며 "디지털 주권은 타협할 수 없는 마지노선으로 삼고 협상에 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