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레터 플랫폼(Substack)
이미지 확대보기세계 증시가 인공지능(AI)과 반도체 열풍에 휩싸여 전고점을 경신하던 시장에 차가운 정적이 흐르는 순간이 있었다. 반도체 ETF와 엔비디아, 마이크론 등 주요 기술주가 폭등세를 이어가고, 한국의 주요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대규모 설비 투자 계획을 발표하며 환호성이 이어지던 무렵이었다. 월가의 대중이 끝없는 상승을 낙관하고 있을 때, 한 남자가 자신의 뉴스레터 플랫폼(Substack)을 통해 한 문장의 서늘한 선전포고를 날렸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의 대규모 투자는 AI 랠리의 정점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종말의 시작(Beginning of the End)'이다. 이제 남은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다."
이 경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당시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 붕괴를 홀로 예견하고 시장 전체에 맞서 거대한 숏(Short) 포지션을 취해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렸던 인물, 마이클 버리(Michael J. Burry)다. 그는 아이셰어즈 반도체 ETF(SOXX) 풋옵션을 비롯해 엔비디아, 마이크론, 어플라이드 머티어리얼즈 등 주요 반도체 및 AI 인프라 수혜주들에 대규모 공매도 포지션을 취했음을 공개했다. 남들이 환희에 차서 매수 버튼을 누를 때, 언제나 시장의 어두운 이면과 과열의 거품을 직시하며 단도를 겨누는 인물. 그는 왜 또다시 시장의 저승사자를 자처하며 홀로 비바람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일까?
2. 고독이 빚어낸 천재성
"남들과 눈을 맞추며 대화하는 법은 배우지 못했지만, 재무제표의 숫자 속에 숨겨진 실체를 읽어내는 법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터득했다." 사람과의 대화는 거짓과 위선이 섞여 있었지만, 제무제표와 데이터의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고독 속에서련된 그의 '데이터 직관'은 훗날 월가 전체를 집어삼킬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3. 주식에 미친 의사
버리는 본래 금융업 종사자가 아니었다. UCLA에서 경제학과 Pre-med(의예과)를 전공한 그는 미국 명문 밴더빌트 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하여 의학박사(M.D.)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명문 스탠퍼드 대학교 병원에서 신경과 수련의(레지던트) 과정을 밟으며 안정적인 신경과 의사의 길을 걷는 듯했다. 그러나 그의 진짜 열정은 청진기가 아닌 재무제표와 주식 차트에 있었다. 의대 재학 시절 및 고된 밤샘 당직 직후의 피로 속에서도, 그는 잠을 아껴가며 주식 시장을 분석했다. 당시 인터넷 초창기 시절, 버리는 자신의 블로그에 기업의 내재 가치와 주가 사이의 불균형을 분석한 치밀한 가치투자 칼럼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가 쓴 분석 글은 기성 펀드매니저들이 작성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깊이를 자랑했다.
현대 가치투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벤자민 그레이엄의 '안전마진' 이론에 기반하면서도, 정밀한 수치적 데이터로 파헤친 그의 포스팅은 순식간에 월가 전문 투자자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탔다. 스탠퍼드 병원 당직실에서 환자를 보다가도 머릿속에는 기업의 가치평가가 떠돌던 그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의사라는 부와 명예가 보장된 전망 좋은 직업을 미련 없이 중퇴하고 전업 투자자의 길로 뛰어든 것이다. 2000년, 그는 친척들과 지인들에게 모은 소액의 자금과 약간의 개인 돈을 털어 자신의 헤지펀드인 '사이온 캐피털(Scion Capital)'을 설립했다.
온 캐피털을 설립한 직후 닷컴 버블이 붕괴했지만, 버리는 철저한 기업 분석을 바탕으로 쇼트(공매도) 및 저평가된 밸류 주식 매수를 병행하며 무서운 수익률을 기록했다. 그의 이름을 세계 금융 역사에 영원히 각인시킨 사건은 바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2000년대 중반, 미국 부동산 시장은 전례 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미국 금융권은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게도 무분별하게 주택 담보 대출(서브프라임 모기지)을 실행했고, 이 부실 채권들을 복잡하게 엮어 안전한 파생상품(CDO)으로 포장해 전 세계에 팔아치웠다.
월가의 대형 투자은행들과 정치가, 언론, 평가기관 모두가 부동산 불패 신화를 노래할 때, 마이클 버리는 혼자 방에 틀어박혀 수천 페이지에 달하는 개별 모기지 대출 서류와 채무 이행 데이터를 일일이 분석했다. 그리고는 대출 회수율이 극도로 악화되고 있으며, 조만간 대규모 연체가 발생해 금융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것임을 확신했다. 그는 주택 시장의 붕괴에 베팅하기 위해 대형 투자은행들을 찾아갔다. 주택 담보 대출이 부실해지면 보상을 받는 신용부도스왑(CDS, Credit Default Swap)이라는 파생상품을 자신에게 판매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당시 은행가들은 "주택 시장이 망할 리 없다"며 그를 비웃고 흔쾌히 프리미엄 수수료를 챙기며 상품을 만들어 팔았다.
버리는 사이온 캐피털 자산의 대부분을 CDS 수수료 납부에 올인했다. 주택 시장이 무너지기 전까지 매달 막대한 프리미엄 비용이 나갔고, 펀드 수익률은 -20% 넘게 깎여 나갔다. 투자자들은 그가 미쳤다며 돈을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하고 폭언을 퍼부었다. 투자자들의 극심한 압박과 외로움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분석 데이터를 믿고 끝까지 버텼다. 마침내 2007년 말부터 부동산 거품이 터지기 시작했고, Lehman Brothers를 비롯한 월가의 공룡들이 연쇄 파산했다. 그 결과, 마이클 버리는 펀드 투자자들에게 4백89%라는 경이로운 수익(약 7억 달러)을 안겨주었다. 본인 역시 1억 달러(약 1,300억 원) 이상의 시즈 시즈 수익을 챙기며 세계 금융사의 신화가 되었다.
5 영화 <빅쇼트>
공매도의 드라마틱한 실화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 마이클 루이스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2015년 아담 맥케이 감독에 의해 영화 <빅쇼트(The Big Short)>로 재탄생했다. 영화에서 마이클 버리 역을 맡은 배우는 바로 메쏘드 연기의 거장 크리스찬 베일(Christian Bale)이었다. 영화 속 마이클 버리의 모습과 비하인드 스토리는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크리스찬 베일은 캐릭터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마이클 버리를 직접 찾아가 며칠 동안 함께 생활했다. 그는 버리의 독특한 말투와 의안으로 인한 어색한 시선 처리 그리고 눈을 제대로 맞추지 못하는 습관을 완벽하게 재현했다.
영화 속에서 베일이 입고 나온 반바지와 맨발, 삼디다스 슬리퍼, 헐렁한 T셔츠는 실제로 마이클 버리가 평소 사무실에서 입던 개인 옷과 소품을 그대로 빌려와 착용한 것이었다. 영화에서 마이클 버리는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그고 헤비메탈 음악(Pantera, Metallica)을 틀어놓은 채 격정적으로 드럼을 친다. 이는 실제 그의 습관이다. 복잡한 수치 계산으로 머리가 폭발할 것 같거나, 투자자들의 비난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는 드럼을 치며 몰입과 카타르시스를 얻었다. 크리스찬 베일은 이 장면을 대역 없이 직접 연주하기 위해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드럼을 급속도로 배웠다.
영화에서도 언급되듯, 버리는 자신의 어린 아들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 진단을 받는 과정에서, 자신이 평생 느껴왔던 타인과의 거리감과 독특한 집착이 '아스퍼거 증후군' 때문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이를 장애라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시장의 노이즈에 휘둘리지 않고 데이터에만 집착할 수 있게 해준 천혜의 무기로 여겼다.
6 마이클 버리가 던지는 질문
마이클 버리는 자신의 자산운용사인 사이온 자산운용(Scion Asset Management)을 이끌며 서브스택과 소셜 미디어를 통해 끊임없이 시장의 맹점을 고발하고 있다. 그가 조준하고 있는 타깃은 'AI 및 반도체 거품'이다. 그는 기업들의 실제 수익 창출 능력에 비해 과도하게 팽창된 설비 투자(CapEx)와 시장의 과열된 심리가 1990년대 말 닷컴 버블 및 2008년 금융위기 직전과 대단히 유사하다고 경고한다. 공매도는 시장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하는 '외로운 싸움'이다. 대중의 희망과 자산 가치의 상승에 반대 방향으로 베팅하기에, 그는 늘 '재재를 부르는 저승사자'라는 비난을 달고 산다. 때로는 그의 숏 타이밍이 너무 일찍 찾아와 손실을 보거나 대중의 비웃음을 사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이클 버리가 금융 시장에서 갖는 독보적인 위치는 변하지 않는다. 대중이 거품의 향연에 취해 위험 신호를 감지하지 못할 때, 한쪽 눈을 감은 채 차가운 데이터의 이면을 꿰뚫어 보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장이 또다시 광기에 휩싸일 때마다, 월가가 마이클 버리의 입과 손끝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김대호 글로벌이코노믹 연구소장 tiger8280@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