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 개봉한 김지운 감독의 느와르 영화 ‘달콤한 인생’ 중 일부다. 주인공은 보스에게 7년 동안 충성을 다했지만 ‘굴욕감’을 줬다는 이유로 보스에게 배신당한다. 주인공은 살기 위해 총을 겨눈다. 이제 와서 돌이킬 순 없다는 말과 함께. 보스는 대답 없이 총을 맞는다.
스타크래프트 리마스터 갑질 논란을 마주하며 달콤한 인생을 떠올린다. 지금까지 한국 PC방은 블리자드의 ‘충성’ 고객이었다. ‘스타크래프트’에 확장팩 ‘브루드워’, 여기에 ‘스타크래프트2’까지 구매할 건 다 구매했다. 만드는 족족 사갔다. 2009년 기준 스타크래프트 전 세계 판매량 1200만장 중 한국 판매량이 680만장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블리자드는 ‘스타크래프트2’도 리마스터도 다 한국에서 최초 공개했다. 충성 국가고 충성 고객이었으니까.
1990년대 씨앗에 불과하던 PC방은 스타크래프트와 함께 자랐다. PC방이 늘어날수록 블리자드의 몸집도 비례해 커졌다. 명실상부 거대 게임사가 된 블리자드는 오는 15일 스타크래프트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리마스터를 출시한다. ‘추억’의 귀환에 한국 유저들은 쌍수 들고 반겼다. 모하임 블리자드 CEO가 코엑스로 날아와 출시계획을 발표했고 트레일러 영상은 ‘한국 헌정’ 급이었다. 전 세계 최초로 한국의 PC방에서 보름 먼저 공개했다. 딱 여기까지만 좋았다.
블리자드는 6월 리마스터 PC방 시간제 과금 정책을 발표한다. 오랜만에 호재에 리마스터를 반기던 PC방 사업자들에게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스타크래프트도 샀고 브루드워도 샀는데 그래픽 좀 업그레이드 했다고 시간당 250원이라니. 리마스터 개인 구매자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PC방에서 한 번, 구매자에게서 한 번. 패키지도 팔고 PC방에서도 벌고 일석이조다.
7월 PC방 사업자 모임인 한국인터넷PC문화협회는 ‘이중과금’ 문제를 지적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블리자드 측에 공문을 보냈다. 그렇지만 블리자드는 묵묵부답이었다. 리마스터를 헌정한다던 ‘한국’에 PC방은 빠져있던 걸까. 그러려면 번지르르 한 말이나 안 했으면.
이중과금 문제보다 더 심각한 것은 블리자드의 불통이다. 갑질 논란이 터져 나온 14일에도 블리자드는 “입장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어쨌든 한국유저들과 PC방은 리마스터를 구입할 것이라는 자신감인가, 아니면 과거 블리자드에 충성을 다했던 ‘호갱님’들의 반발에 모욕감이라도 느낀 걸까.
스타크래프트는 한국인들에게 특별하다. 스타크래프트에 관련된 추억담만 나눠도 하룻밤은 오롯이 지샐 수 있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불통과 갑질 논란에 아름다웠던 스타크래프트의 추억이 빛이 바랠까 두렵다. 이럴 거면 차라리 내지 말지 그랬나 싶다. 추억이 사라진 자리만큼 오만이 채우고 있다.
신진섭 기자 jshi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