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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하고도 사죄하지 않는 한국사회…용서까지 메말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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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하고도 사죄하지 않는 한국사회…용서까지 메말라 버렸다

[심리학자 한성열의 힐링마음산책(170회)] 용서의 문화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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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서양의 용서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 영화 '밀양'. 우리 사회는 가해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더불어 사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용서가 드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2007년 개봉된 영화 <밀양>은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 특히 한국 문화와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이 영화로 주연 신애역을 맡은 전도연이 ‘제60회 칸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아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죽은 남편의 고향인 밀양(密陽)에서 작은 피아노 학원을 개업하고 새 삶을 살아가려는 신애에게는 삶의 위안과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어린 아들 준이 있다. 밀양에서 새 삶을 시작한 신애는 어느새 아들 준의 학교 학부모들이나 마을 주민들과도 어울리게 될 만큼 외지에서의 생활에 적응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평안한 생활은 얼마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끝난다. 아들 준이 유괴되어 살해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아픔과 슬픔, 상처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숨까지 헐떡이며 울음을 터뜨리는 신애는 이제 더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해 방황하게 된다. 이때 신애에게 기독교가 다가온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기독교의 용서 교리를 받아들인 신애는 자신이 범인을 용서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교도소로 범인을 만나러 간다. 이 교도소에서 신애는 범인의 모습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범인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부터 마음이 편해졌습니다”라고 평안한 얼굴로 태연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죽인 아이의 엄마 앞에서 자신은 하느님께 용서받았고 편안해졌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신애는 절규한다. “내가 그 인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느님이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난 이렇게 괴로운데... 그 인간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용서받고 구원받았어요.. 어떻게 그러실 수 있어요...”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영화 <밀양>은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용서(容恕)’의 의미와 과정이 서구와 한국에서는 어떻게 서로 다른지에 대한 관점에서 논하려고 한다. 이 영화에서 기독교로 대변되는 것은 서구 문화이고, 기독교적 용서를 서구적인 용서라고 바꾸어도 그 의미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구는 ‘개인주의’ 문화이다. 개인주의 문화에서 행동의 주체는 ‘개인’이다. 서구에서 개인을 나타내는 단어는 ‘individual’이다. 이 단어는 반대를 뜻하는 접두사 ‘in’과 명사형 어미 ‘-ual’ 그리고 ‘나누다’라는 뜻을 가진 어간(語幹) ‘divide’로 구성된다. 즉, 개인(個人)은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 말은 서구에서는 개인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부분이 없는 그 사람만의 독자적인 존재라고 이해한다. 즉, 개개인의 독자성과 독립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기본 단위는 ‘나’이고, 대인관계는 개인 ‘나’와 개인 ‘너’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의존적이기보다는 독립적인 것을 강조한다. 궁극적으로 ‘나’는 ‘너’와 별개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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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
​용서와 화해에 대한 서구·동양문화
영화 밀양은 문화 차이 극명하게 노출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 문화에서는 인간관계의 기본 단위가 ‘나’와 ‘너’의 개별적 존재의 만남이 아니라 ‘우리’이다. 우리는 물론 형식적으로는 ‘나’와 ‘너’로 이루어지지만 심리적으로는 ‘나’와 ‘너’를 혼합하여 또 다른 존재인 ‘우리’가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우리’ 안에서 나와 너는 따로 존재하기보다는 우리를 구성하는 단위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서구 문화에서는 ‘나의 학교(my school)’ 혹은 ‘나의 아내(my wife)’로 주체가 ‘나’ 이지만, 한국 문화에서는 ‘우리 학교’ 또는 ‘우리 아내’라고 형식적으로는 복수형인 ‘우리’로 표현한다. 만약 ‘나의 학교’ 또는 ‘나의 아내’라고 표현하면 어색하다. 한국에서의 ‘우리(we)’는 형식상으로는 복수형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수형이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우리 아내’이자만 누구나 단수인 ‘나의 아내’로 이해한다.

문화 차이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서구인과 한국인의 용서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다. ‘용서’는 피해를 입힌 가해자와 피해를 당한 피해자가 존재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피해(被害)는 재산과 같은 물질적인 것과 ‘억울함’과 ‘분함’과 같은 감정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물질적인 피해는 보상(報償)이나 배상(賠償)을 통해 일차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심리적인 피해를 보상하는 것은 훨씬 미묘하고, 그 과정에서 문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구에서의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너’의 행위와 관계없이 독립적인 존재인 ‘나’에 의해서만도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즉 잘못을 저지른 ‘너’가 사과하고 용서를 빌지 않아도, 너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나’의 의지만으로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물론 상대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빈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것이 없어도 용서는 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오히려 상대가 용서를 빌지 않는 상황에서 용서하는 것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그럴 때 고귀(高貴)한 인품을 가진 것으로 높이 칭송하기까지 한다.

​아들 준 유괴되어 피살되는 사건발생
주인공 신애 울음 떠뜨리면서 방황

하지만 한국문화에서는 용서는 나와 너가 함께 관여하는 ‘우리’의 문제이다. 피해자인 내가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가해자인 너의 행동이 선행되어야 한다. 가해자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빌어야 한다. 그래야만 피해자가 그 행동에 대응해서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머리로는 용서를 해야 한다고 또는 용서를 했다고 느끼지만, 가해자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 전에는 용서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용서의 전제조건인 너의 잘못 인정과 사과가 있어야 비로소 내가 용서하고, ‘우리’의 심리적 갈등이 해결되는 것이다.

영화 <밀양>에서 서구의 방식으로 자신이 아들의 살해범을 용서를 했다고 여긴 주인공 신애는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교도소로 아들의 살해범을 면회한다. 이 상황에서 신애는 살해범이 자기가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용서를 빈다면 자신도 기꺼이 용서해주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은 이미 용서했으니까...이 과정에서 용서의 주체는 자신이고 먼저 가해자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 전제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피해자와 가해자로 연결된 우리의 문제도 해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예상외로 전개됐다.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는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으로 괴로워야 할 살인범이 평온한 얼굴로 이미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고백하는 순간,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던 분노와 절망이 솟구쳐오른다. “도대체 하나님이 뭔데 외아들을 잃은 어미인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 미리 용서할 수가 있단 말인가?” 살인자는 오직 피해자인 자신만이 용서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이 관계는 두 사람만이 풀 수 있는 관계인 것이다. <밀양>의 신애는 결국 한국 사람이다.

​'원수도 사랑하라' 교리 수용하지만
교도소서 범인 모습에 엄청난 충격

용서(容恕)는 사전적 의미로 ‘지은 죄나 잘못한 일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하지 아니하고 덮어 주는 것’이다. 한자로는 ‘얼굴 용(容)’과 ‘용서할 서(恕)’로 되어 있다. 서(恕)는 ‘같을 여(如)’와 ‘마음 심(心)’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용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같은 마음’이어야 한다. 즉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마음이 같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피해자가 느끼는 감정을 같이 느끼고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하다고 사죄를 하여야 한다. 그래야 피해자는 상대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공감하고 인정해준다는 것을 느껴야만 가해자의 마음을 받아들이고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용서가 드문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피해자의 마음이 각박해져서 용서를 못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미움을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도 괴롭기 때문에 빨리 용서해주고 싶은 마음이 많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가해자들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더불어 사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말 우리 사회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착하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는 사회는 바르지(義) 못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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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열 고려대 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명의 심리학’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노정용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noja@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