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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슈 24] 미국 금주법 탄생 100주년에 건배!…되돌아보는‘고귀한 실험’ 대실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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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이슈 24] 미국 금주법 탄생 100주년에 건배!…되돌아보는‘고귀한 실험’ 대실패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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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되면서 선술집에서 환호를 하고 있는 술꾼들.

■ 시행초기엔 ‘고귀한 실험’이라며 찬사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20년 1월17일 미국헌법 수정 제18조가 발효되면서 미국 내 알코올 음료의 양조와 판매가 위법으로 됐다. 이를 추진하는 세력은 이를 ‘고귀한 실험’이라고 내세웠고 전미의 금주법 지지자들은 이를 칭찬했다.

전 프로야구선수로 금주추진에 기여한 빌리 선데이는 1만 명의 청중을 앞에서 “오늘 밤 자정부터 새로운 나라가 생겨납니다. 명석한 생각과 바람직한 매너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슬럼가는 곧 과거의 유물이 될 것입니다. 형무소나 소년원은 비워져 공장으로 모습을 바꿉니다. 남자들은 모두 똑바로 걷고 여자들은 모두 미소 지을 것이고 아이들은 모두 웃는 소리를 낼 것입니다. 지옥의 문은 영원히 닫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후 금주법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그러나 선데이를 비롯한 금주법 추진파가 약속한 ‘새로운 나라’는 결국 찾아오지 않았다.

■ ‘금주법’에 앞장섰던 당시의 활동가들

수정헌법 제18조는 1919년 1월에 성립하고 ‘주류의 제조와 판매, 수송’을 48개주(당시) 전역에서의 유통을 금지했다. 미국의회는 수개월 후 맥주, 와인 등 당초 명확하게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던 다른 알코올음료도 포함하는 내용의 ‘볼스테드법’을 가결했다. 볼스테드법은 의료용이나 종교의식에서의 알코올사용 등 몇 안 되는 예외는 인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은 술을 마시는 쪽이 아니라 제공하는 쪽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술의 소지와 음주는 합법 그대로였다.

금주법의 역사는 1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는 종교단체나 미국금주협회 등의 사회단체가 ‘알코올의 재앙’ 등 술에 의한 부정적 영향을 문제 삼고 있었다. 1850년대 미국 메인 주 등 몇 개주에서 알코올 금지법을 시험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현지의 반대로 덮었다. 금주법 도입의 흐름 속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이 여성단체였다. 운동가들은 술에 취한 남편이 아내나 아이들을 때리고 있으며, 음주가 가정폭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금주법 지지자들은 알코올 남용이 빈곤의 원인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1869년에 ‘금주 당’이 결성되자 1870년대에는 이 당이 전개하는 운동을 지원하려고 기독교 여성금주협회(WCTU)가 알코올 금지하자는 대대적인 캠페인을 개시했다. 19세기의 용어로 모든 술을 끊은 사람을 가리키는 ‘금주자(Teetotalers)’는 백악관에도 있었다. 러더퍼 B 헤이스 대통령과 아내 루시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내놓지 않았다고 한다.

1890년대 매우 조직된 로비활동단체인 금주연맹(ASL)이 금주 캠페인을 지지했다. 주정뱅이에서 벗어나 기도하는 자도 있었고, 주점을 물리적으로 습격하는 자도 있었다. 활동가의 캐리 네이션은 1900년대에 도끼로 술집을 파괴하고 돌아갔다는 점에서 이름을 날렸다. ‘드라이(금주법 지지자)’들의 이러한 요구는 1910년대에도 그치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에 의해 전쟁 중의 알코올 금지를 의회가 승인하자 금주세력은 기세가 붙었고, 수정헌법에 의한 금주를 요구하며 의회에 계속 압력을 가했다. 수정은 상하 양원에서 승인되어 1919년 1월 전국 4분의 3의 주가 비준하면서 성립되어 1920년 1월부터 효력을 갖게 됐다. ASL의 웨인 윌러는 하원의원 앤드류 볼스테드와 협력하여 새로운 수정이 어떻게 적용되고 시행되는지의 개요를 나타내는 볼스테드법(정식적으로는 국가금주법이라 불린다)을 입법했다.

■ 갱 조직들 밀수·밀조 돈벌이 수단 변질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 새로운 법을 돈을 벌기 위한 기회로 보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러나 미국은 증류주를 만드는 나라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캐나다의 위스키, 카리브 해의 럼주 등 밀매조직들은 알코올을 미국시장에 잠입하게 하려면 자금, 수송수단, 완력만 있으면 되었다. 술에 목마른 미국인들은 가격이 오르더라도 술을 살 것으로 여겨지면서 막대한 이익을 거둘 것으로 예상했다.

밀매상은 전미의 도시에서 암약했다. 디트로이트에서는 캐나다에서 들어오는 술의 유통을 ‘퍼플 갱’이 지배했다. 뉴욕에서는 이탈리아계 이민이 5대 패밀리를 만들었고 거리는 ‘웨트(금주법의 반대자는 이렇게 불렸다)’들은 언제든 돈만 있으면 술을 구할 수 있는 상태 그대로였다.

시카고에서는 ‘스카페이스’란 별명의 알 카포네와 조니 토리오가 시중 술 유통을 관리하는 마피아 조직 ‘시카고 아웃핏’을 설립했다. 카포네는 범죄로 인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한 자료에 따르면 그의 연간 수입은 6000만 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밀매의 규모가 확대되고 복잡해지자 갱들은 조직적으로 뭉치기 시작했고 변호사, 양조업자, 선장, 트럭운전사 등 많은 사람을 고용했다. 심지어 조업을 중지한 양조소를 사들여 판매를 위해 스스로 밀조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당초 갱 조직은 활동을 현지의 한 지역으로 한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각각이 세력 확대를 꾀하기 시작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립과 분쟁이 생겨나 총격, 폭파, 살인 등의 폭력사태가 빈번히 일어났다.

■ 법 시행 이후 되레 선술집 융성 아이러니

알코올을 찾는 손님들은 ‘스피크 이지’나 ‘진 조인트’로 불리던 선술집을 찾았다. 뉴욕에는 1920년 금주법이 시행되기 전 단계에서 1만5,000여개의 술집(살롱)이 있었지만, 법안통과 후 되레 숫자가 격증했다. 정확한 수에 대하여 이설이 있지만 역사연구자는 가게의 수를 3만2000여개에서 10만개 사이라고 보고 있다. 싸구려 술을 파는 검소한 가게부터 칵테일, 재즈 연주, 춤 등이 팔리는 세련된 나이트클럽까지 다양한 가게가 있었다.

한편에서는 밀주가 횡행했다 1920년대는 ‘재즈 에이지’라고 불리게 된 소설 ‘위대한 개츠비’(1925년)을 쓴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조어다. 이 시절 그녀는 1920년에 참정권을 얻은 적도 있고 자유를 누렸다. 여성들은 칵테일을 마시고 오래된 사회관습을 물리치고, 금주법 시대의 문화를 구가했다. ‘플래퍼(말괄량이 딸)’라고 불리던 그녀들은 머리를 쇼트 컷으로 하고 기장이 짧은 라인의 드레스를 입고 담배를 피우며 춤을 추었다.

■ 결국 큰 실패로 끝나버린 ‘고귀한 실험’

범죄 신디케이트는 현지당국을 매수해 세력을 확장하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밀매를 막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나타났고 특히 도시지역 여론은 금주법 반대로 돌아섰다. 1927년에 들어서면서 ‘고귀한 실험’은 대실패로 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금주법을 끝내는데 필요한 것은 또 다시 헌법수정이었다.

1932년 대선에서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현직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 압승하자 변화가 일어났다. 1933년 2월 상하 양원은 금주법을 폐지하는 수정헌법 제21조의 법안을 처리하고 비준을 위해 각 주에 송부하고 이 해 12월에 비준됐다. 결국 수정 제21조에 의해서 수정 제18조가 폐지되면 ‘고귀한 실험’은 끝났다.

금주법 폐지는 정부에도 이익을 가져왔다. 당시 나라를 괴롭히던 대공황과의 싸움에 알코올로부터의 세수가 도움이 된 것이다. 대중문화도 세상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었던 것 같다. ‘Happy Days Are Here Again(즐거운 시간이 돌아왔다)’ ‘Cocktails for Two(둘이서 칵테일을)’라는 노래가 울려퍼졌다, 누구나 이런 노래를 흥얼거렸다.


김경수 글로벌이코노믹 편집위원 ggs077@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