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을 그린 화가 장 마르크 로셰트(57)와 시나리오를 쓴 작가 뱅자맹 르그랑(63)은 15일 부천국제만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봉준호 감독이 우리를 선택해줬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며 기뻐했다. 이들은 2008년 서울 국제만화페스티벌에 참석, 봉 감독과 대담하기도 했다.
그래픽노블 ‘설국열차’는 1970년대부터 자크 로브(시나리오)와 알렉시스(그림)의 구상으로 시작됐다. 알렉시스가 1977년 사망한 후 장 마르크 로셰트가 합류해 1984년 출간됐다. 자크 로브가 1990년 세상을 떠난 후 장 마르크 로셰트는 뱅자맹 르그랑과 함께 시리즈를 재개해 2, 3권을 2000년에 마무리했다. 봉 감독의 ‘설국열차’에 출연하기도 한 이들은 영화화에 큰 만족을 표했다.
로셰트는 “계약 당시 ‘괴물’, ‘살인의 추억’ 등을 보고 그의 능력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며 “프랑스 감독들에게 세 번 영화화 제안을 받았다. 한 번은 프랑스 유명배우이자 감독인 로베르트 호셍이 진지하게 영화화를 원했는데 자크 로브가 거절했다. 80년대에는 이야기를 실감나게 만들 테크닉이 없었을 때이므로 잘 거절한 것 같다”고 밝혔다.
르그랑은 “판권에 대한 얘기가 오갈 때 봉준호 감독이 칸국제영화제에 ‘괴물’로 참석하게 돼 우리집에 초대를 했고, 그때부터 우리 셋은 우정을 쌓아가게 됐다”고 봉 감독과의 인연을 언급했다.
-‘설국열차’가 영화로 재탄생했다.
로셰트. “영화의 큰 성공에 힘입어 원작도 잘 나가고 있다는 소식에 기뻤다. 시작도 기적적으로 됐는데 더 좋은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봉준호 감독이 많은 사람을 통솔, 지휘하고 계산하며 영화를 만드는 것을 보고 그 일의 중압감을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영화는 만화보다 훨씬 더 큰 작업이다.”
르그랑. “프랑스에서 한국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박찬욱, 봉준호 외에 젊은 감독들도 프랑스에서 인기를 얻고 있고, 칸영화제 후보로 종종 오른다. 한국영화의 저력을 느낄 수 있었다.”
-영화에 직접 출연하기도 했는데.
로셰트. “영화에서 기록을 남기는 화가 역의 손으로 출연해 그림을 그렸다. 여러 대의 카메라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내 일생의 가장 큰 스트레스로 자세히 보면 손이 떨리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가 그림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다 내게 맡기고 별다른 주문은 없었다. 촬영지 근처 호텔에 묵으며 돌아다니면서 더러운 종이를 주워 거기에 그림을 그렸다. 좀 더 낡아보이도록 훼손하기도 했다. 내 그림이 야생적이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면들을 봉준호가 무척 좋아했다.”
르그랑. “엑스트라로 참여했는데, 그때 하얀 수염도 붙이고 모래,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촬영해야했다. 어디서 온 사람인지로 모를 정도여서 ‘러시아 사람 아닐까’라고 농담을 하곤 했다.”
-영화 원작으로서의 만화의 힘에 대해서 말해달라.
로셰트. “만화는 이야기의 원천으로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자본 투자의 제약을 받지 않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그림 작가로서 그림으로 생각을 담아낼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만화의 영화화는 미국, 프랑스, 한국 등 전세계적 현상으로 보여진다. 기술의 발전으로 만화로만 표현 가능하던 것을 영화로 찍을 수 있는 상황이 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이런 경향이 더 심화되리라 본다. 자신이 만들어낸 창작물이 제2의 창작자에게 다시 해석 표현되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원작자로서 큰 기쁨이다. 창작의 소스가 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르그랑. “소설도 쓰고 연극 극본도 써왔는데, 그때는 항상 고독한 작업이라고 느껴진다. 만화는 그림작가와 함께 할 수 있어서 좋다. 둘이서 상상력을 총동원할 수 있는 매체이기 때문에 좋다.”
로셰트. “그 표현을 하는건 난데 너무 힘들다.”(웃음)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에 열차라는 아날로그적 소재를 사용한 이유는 뭔가. 원작만화는 계급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불행한 숙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그리는데 이런 비관적 내용과 결말을 정한 이유는.
르그랑. “알고 있겠지만 자크 로브라는 시나리오 작가가 원작가다. 알렉시스라는 젊은 작가가 4페이지 를 그리다가 동맥파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로셰트와 1권을 완성시키고 돌아가시고 20여년 후 로셰트가 묻혀두기는 아깝다는 생각에 시나리오 작가를 물색해 내가 투입됐다. 기차는 내가 만든 건 아니지만 시스템 자체가 어딘가를 향해서 굴러간다는 상징을 부여하고 싶었다. 젊은 만화가를 잃어버린 작가의 어려운 상황이 1권의 출발부터 반영됐다고 보인다. 나도 낙관주의와 비관주의 중 비관주의 쪽을 택하고 싶다.”
-원작만화는 3권에서 비관적으로 마무리되는데, 영화는 낙관적인 결말을 가진다. 또 후속 얘기를 더 발표할 것인가.
르그랑. “1권을 쓴 자크 로브는 등장인물들이 거의 죽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래서 2, 3권에서 다른 탈출구를 찾아나가느라 고생했다. 4, 5권에서는 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생각 중이라 아직 덜 다듬어진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봉준호가 재해석한 부분은 제작단계에서 시나리오를 읽어서 알고 있었다. 낙관주의적이라는 알 수 있었는데, 완벽한 경지에 있었기 때문에 그를 전적으로 믿었다.”
로셰트. “4, 5권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는데, 생각을 해보고 있다. 르그랑과 호텔, 비행기 등에서 얘기를 나눠보고 있는데 아직 구체적인 계획이 나온 것은 아니다. 1권을 그렸을 때는 20대라 갓 데뷔한 신인으로 임했고, 99년도에 2, 3권 나왔을 때는 20년간 화가 활동을 해오면서 그래픽이 변했다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도 또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고 본다.”
-3권의 내용에는 동양적인 사상이 가미된 것으로 보이는데.
르그랑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아서 ‘주역’ 등을 읽었다. 동양 감독에게 이 스토리가 발탁된 것은 그러한 것의 영향이었을까. 이런 우연을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데 현실이 됐다.”
로셰트. “동양미술에 관심이 많다. ‘주다’라는 중국 고대 화가에게 물이 흐르는 듯한 선 등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뉴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