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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화의 힘' 상상초월…콘텐츠 산업 미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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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화의 힘' 상상초월…콘텐츠 산업 미래 보다

[안도현의 글로벌 경제 투어(20)] 세계 초강대국 유럽(프랑스·영국·아일랜드)

르 트레포트의 석양
르 트레포트의 석양
전 세계의 '보물창고' 파리…수천만 관광객 불러들여


“그냥 철탑이구먼….”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기둥덩어리와 돌덩어리라고 단순하게 평가한 동생은 세계적 상징인 프랑스 에펠탑을 다시 단순한 철탑으로 평가했다. 상종 못할 문화적 하등인으로 생각하다가 자세히 보니 동생 말처럼 거대한 철탑이 맞고 이탈리아 피사의 사탑이나 태국 방콕의 탑들보다 더 화려하거나 멋진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저녁이 되니 화려한 조명이 시작되고 동생 역시 반짝거리는 에펠탑에 취해 감탄사를 연발했다.

“완전 장물 전시장이구먼….”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리가 아프다며, 축구와 음악 외에 역사와 예술에 관심이 많지 않은 동생은 전 세계에서 도둑질을 해왔다며 세계적 박물관을 한마디로 평가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목이 없던 조각상들의 머리가 모조리 프랑스에 있고,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한국의 유물들, 페르시아와 오스만제국, 아프리카의 보물들이 루브르에 있었고 하루를 봐도 모자랄 세계적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세계사와 미술사, 역사책에서 보던 유물과 보물들을 보며 가슴이 뛰기도 하고 프랑스의 문화적 자부심에 기가 죽었다. 미국이 세계적 강대국이긴 하지만 프랑스의 미술관과 박물관의 보물들을 소유하지는 못했다. 역사는 강대국 중심으로 흐르고 승자들이 보물과 유물들을 보관하는 것을 프랑스와 영국 대영박물관을 방문하고 느낄 수 있었다.

프랑스는 세계의 박물관이며 세계 예술과 문화의 중심으로 수천만명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ATM이 되어 프랑스에 돈을 뿌리고 있었다. 평생을 어렵게 모아 가난을 딛고 일어선 개발도상국의 중산층들이 프랑스에 와서 수백, 수천 유로를 소비하고 자국에 돌아가 에펠탑 사진을 걸어 놓고 프랑스 방문을 자랑하며 또다시 부지런히 돈을 모을 것이다. 문화의 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고 무서웠다. 쥐라기 공원 영화 한 편이 자동차 150만대를 수출한 것과 같다는 이야기처럼 무형의 서비스 산업과 콘텐츠 산업의 힘은 경제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었다.

빵집을 향해 걸어간 노르망디의 르 트레포트
빵집을 향해 걸어간 노르망디의 르 트레포트
왕의 목을 자른 프랑스인들 자유와 평등의 가치 중시


“우리는 왕의 목을 자르고, 귀족들을 처단하고 학생들이 몽둥이를 맞아가며 혁명을 일으켰다. 그리고 나치에 협력한 이들을 오로지 숙청했다.” 곰팡이가 핀 치즈에 크래커를 맛보라고 주면서, 기차에서 만난 클레어라는 프랑스 친구가 ‘어떻게 프랑스는 강국이 되었느냐?’라는 나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했다. 프랑스가 왜 예술과 문화의 중심인지에 대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며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여 문화 강국으로 성장했다고 말했다. 아버지 세대에는 대학생들이 기성세대에 대항하는 68혁명을 통해 프랑스 대학의 학벌과 계층 간의 격차를 줄이는 변화를 이끌었다고 했다.

프랑스 국가인 마르세유의 노래(La Marseillaise)에는 매국노와 왕, 귀족들에 대항해 시민들이 무기를 들고 죽여서 피를 밭에 뿌리자는 잔인한 가사가 있다고 했다. 국토를 굳건히 보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강조하는 우리나라 국가와는 달리 죽여서 피를 흘리자는 내용의 국가를 부르는 프랑스인들이 무서워졌다.

영국으로 가기 위해 지도상에서 영국과 가장 가까운 지역으로 향했고, 그곳에 페리가 있어 기차를 타고 찾아갔다. 영어가 통하지 않아 어렵게 찾아간 선착장에서는 오직 화물만 갈 수 있으며 여객선은 다른 도시에 가야 한다며 지친 우리를 좌절시켰다.
해가 졌고 여행경비는 얼마 남지 않았으며 마지막 여행지인 영국, 아일랜드의 방문을 앞두고 이름 모를 프랑스의 항구에서 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는 수 없이 기차 안에 몰래 숨어 잠이 들었고 날씨는 초가을로 접어들어 추위에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어디선가 구수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나는 동생에게 잠깐 다녀오겠다며 빵의 냄새를 따라 계속 걸어갔다. 근처에 있을 것 같은 빵집은 매우 멀리 떨어져 있었고 나의 후각은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해 새벽 빵집을 찾아 갓 구워낸 바게트 빵을 살 수 있었다. 차가운 새벽에 굶주린 배를 채우는 빵은 동생에게 돌아오는 길에 모두 사라졌고, 나는 다시 빵집으로 돌아가 바게트를 몇 개 더 샀다. 막 구워낸 빵이 그렇게 맛있는지는 난생 처음 알게 되었다. 조그만 해변가 도시 르 트레포르(Le Treport)에서 여유 있게 식사를 하는 프랑스인들 앞을 지날 때 달콤한 냄새를 견딜 수 없었고 우리는 그들처럼 고급 식사를 하기로 했고 결국 마지막 남은 경비는 바닥이 나버렸다.

동생과 나는 여행을 접기로 하고 우아하게 해변가에 앉아 노르망디 해산물 음식을 맛보았다. 당장 내일이 없는 달콤한 식사를 마치고 한국에 전화를 걸어 부모님께 송금을 요청했다. 결국 추가 경비를 지원받고 다시 프랑스 릴을 향해 유로스타를 타고 런던으로 넘어갔다.

아일랜드 더블린의 템플바
아일랜드 더블린의 템플바
세계금융의 중심 런던…서비스산업으로 경쟁력 유지


런던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문명사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안내판이나 간판 심지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까지 모두 영어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고 손짓 발짓을 하며 다닌 유럽에서 영어는 결국 영국의 언어였고 영화에서 보는 액센트로 모두 영어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런던에서 숙소를 찾아 헤매는 우리에게 런던 시민들은 답변을 하지도 안내를 해주지도 않았고 도시 한 가운데에서 어딘가에서 온 아시아인이 되어 분주한 도시인들 속에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대영박물관을 방문한 동생은 또다시 전 세계에서 도적질해 온 장물 보관소라며 세계적 박물관을 다르게 평가했다. The British Museum이면 그냥 ‘영국박물관’이라면서 세계를 지배하던 대영제국의 상징인 대영박물관에 대한 한국인의 사대주의를 비판했다.

런던이란 수도에 또 다른 런던 시내가 있었고 이곳이 바로 세계금융의 중심지였다.
산업혁명을 이끈 영국은 제조업 중심에서 금융, 유통, 콘텐츠, 문화 등의 서비스산업으로 전환해 높은 부가가치로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숙소에서 만난 한국인은 나중에 동생이 장애인인 것을 알고 실은 자신도 장애인이라며 콤플렉스를 극복한 동생을 높이 평가했다. 여행 초반에 불편한 손을 숨기며 시선을 피하던 동생은 여행 막바지에는 다친 손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영국인 아이들에게 호랑이랑 싸우다 다쳤다며 농담을 하고 커다란 흉터와 장애에도 상관없이 자유롭게 행동하고 있었다.

60일이 넘는 여행을 통해 동생의 사고는 넓어졌고 국가를 이동하는 것과 친구를 사귀는 것, 세계적 문화유산과 대국에 대한 자신감이 커졌다. 더 이상 내 동생은 스스로를 장애인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를 불편한 시선으로 대하는 이들을 장애인으로 대하기 시작했다.

제임스조이스의 생가
제임스조이스의 생가
가장 뜨겁고 행복했던 더블린의 마지막 밤 기억 아련

브리스톨에 도착하고 저가 항공을 타고 아일랜드로 향했다. 대학에 실패하면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면서 빠져든 가장 좋아하는 작가인 제임스 조이스의 책들이 살아 숨쉬는 아일랜드에 도착하자, 나는 설렘에 심장이 뛰고 행복했다.

톰 크루즈가 주연했던 파 앤드 어웨이(Far and away)의 배경인 감자와 영국지배에 지독한 서러움을 겪던 아일랜드에 도착하자 나는 부지런히 아일랜드 기념품을 사고, 제임스 조이스의 생가와 박물관 그리고 기네스 맥주 공장과 더블린 템플바에서 맥주를 마셨다. 3개월의 기나긴 28개국 유럽 방문 여정의 마지막 국가에서 우리는 음악과 맥주에 취해 밤새도록 떠들고 소설속의 더블리너가 되어 맘껏 여흥을 즐겼다.
빠른 말투에 술과 떠벌리기를 좋아하는 아일랜드인들은 나의 미국 남부 사투리와 인도식 영어에 배꼽을 잡고 밤새도록 이야기를 했다.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기고 가장 뜨겁고 행복한 더블린을 뒤로하고 벨기에를 거쳐, 프랑크푸르트에서 베트남을 거쳐 한국에 도착했다. 강력 본드로 수없이 접착한 나의 발은 굳은 본드가 신발이 되어 상처를 덮고 있었고 기미와 주근께, 주름으로 늙어버린 얼굴이 되었다.

수많은 다툼이 있었고 힘들고 불편한 여행을 통해 상처를 받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했지만, 결국 목표를 달성했고 경험을 통해 성장할 수 있었다. 동생은 나중에 장애인사회복지사가 되었고, 지금은 보건부 공무원이 되었다.

여행에서 돌아와 코트라에서 나이 많은 인턴을 하게 되었고, 불투명한 미래를 앞두고 나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소송에서 패소한 나의 재산은 0원, 직업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했다. 세계 여행 경험과 대학원 졸업 예정이 나의 유일한 스펙이었다.
안도현 데카트롱 동남아 개발총괄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