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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살(孤鸞殺)보다 더 무서운 고난살(苦難殺)!-고란살(孤鸞殺)(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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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살(孤鸞殺)보다 더 무서운 고난살(苦難殺)!-고란살(孤鸞殺)(하)

[김미석의 신살(神殺)로 풀어보는 세상이야기(4)]
짝 잃은 외로움보다 더 외롭고 고독하고 더 무서운 것이 있다.

"이달 초 서울 보광동에서 70대 노인이 단칸방에서 쓸쓸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며칠째 연탄재가 나오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긴 이웃이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그 이웃이 무심히 지나쳤다면 죽은 채로 단칸방에서 몇 달을 지냈을지 모릅니다. 부산에선 숨진 지 5년 만에 백골 상태로 발견된 경우도 있습니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 너머에 독거노인이 많이 사는 쪽방촌이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만 1월 한 달 동안 네 명이 외로운 죽음을 맞았습니다. 고독사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습니다."[2015년 2월 13일자]

고단한 삶을 지탱하다 결국 세상 떠날 때 아무도 곁에 있어주지 못한 쓸쓸한 죽음이 늘어가고 있다. 사망 후에 누구도 그 시신을 발견하지 못해 몇 달, 몇 년을 영면에 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세상 떠나는 그 길에 어느 한 사람의 배웅도 받지 못한다면 저승길이 얼마나 외롭고 무서울까.

통계청에 따르면 혼자 사는 사람(1인 가구)이 급증하는 추세라고 한다. 1990년 102만명, 2000년 222만명, 2010년 414만명으로 10년마다 대략 곱절로 늘어가고 있으며, 2020년에는 600만명을 넘을 것이라 한다. 2030년에는 1인가구가 가장 보편적 가구 형태가 될 것이라 예상을 발표하였다. 더욱 걱정인 것은 1인가구의 빈곤율은 47.2%로 전 가구 평균(13.7%)의 3.5배나 된다는 것이다.
굳이 통계청에서 발표한 수치에 기대지 않아도, 그리고 ‘사후 약방문’식의 보도가 아니더라도 주변을 둘러보면 자기 몸보다 몇 곱절 무거운 삶의 팍팍함을 온몸으로 짊어지고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들이 있다.

사실,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이야 선택사양으로 외로움을 택할 수는 있다. 고독이 취미생활인 것이다. 외로운 자산가들이야 경제활동 중이나 취미활동 중에 그 밖에 활동으로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야 외로움과 언제라도 작별할 수 있으니 이들의 외로움은 자발적 외로움인 것이다. 이들의 외로움과 고독은 오히려 자기정화를 이뤄내고 더 큰 자아로 성장하는 황금시간일 수도 있다.

물론 돈으로 진정한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절대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안 된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메커니즘까지 논하지 않더라도 속물적 근성은 인간 본연의 본성 아니겠는가.

하지만, 취향의 선택이 아닌데도 외로울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더 무서운 현실은 고난과 가난이다. 고난이 흉살로 인생살이에 무섭게 작용되는 것이다. 고난살(苦難殺)이 팔자에 든 것이다.

매우 많은 신살의 종류와 명칭 중 고란살(孤鸞殺)은 있어도 고난살(苦難殺)은 없다. 물론 가난을 예보한 신살이 있긴 있어도 말이다. 필자가 언어의 유희(遊戱)로 만든 신살이다.

알고 보면 누구나가 외롭다. 너무나도 즐거워 보이는 그들도 이따끔씩 외롭고 고독하다.
그러나 외롭고 고독한 누구나가 빈곤하거나 가난하거나 고난스러운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경제구조는 그저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반드시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고 100% 장담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누구나가 공평하게 다 힘들던 전쟁 후 보다 상대적으로 더 피폐한 이들의 고난살은 스스로가 노력해도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실정인지도 모르겠다.

외로운 사람 중에 빈곤하고 어려운 그래서 외로운 고난살에 힘겨운 이웃들에게 관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할 것이다. 관심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그들의 외로운 고난살을 벗겨줄 귀인(貴人)은 우리밖에 없다. 이 비루한 글을 읽고 계실 독자 당신이 귀인(貴人)이신거다.

아낌없이 정을 퍼주지만 알아주지 않는 님 때문에 외로운 고란살(孤鸞殺)님들~
정말 외롭고 고단한 고난살(苦難殺)님들에게 그 정을 나눠주신다면 어떠실는지...

다시 <공무도하가(공후인)>공무도하가로 돌아가 보자. 설화의 사실여부는 차치하고 백수광부(白首狂夫)와 그의 처(妻)는 역시 결국 서로를 외롭게 만드는 고란살에 해당하는 커플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백수광부의 삶은 꽤나 팍팍했을 것이고 그래서 열심히 살면 살수록 미치지 않고는 버텨내지 못할 정도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고단한 삶의 광증(狂症)이 아내의 절규에도 못내 죽음으로 내 몰았을 때, 아내의 외로움은 극치에 달했을 것이고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아내 역시 외로움을 생명과 맞바꾸지 않았을까 싶다.

아쉽다. 그 현장을 목격한 곽리자고는 적어도 백수광부 처의 외로운 죽음을 방관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그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동료애(同僚愛)를 적극 발휘했어야 했다. 가슴 아파 하며 그들의 외로움을 노래로 추모하는 것은 그들의 외로움을 방관한 자들의 뻔한 자기위로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이웃인 백수광부와 그의 처(處)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수 있고 우리는 곽리자고와 여옥처럼 그들의 외로운 소식에 가슴 아파한다.
행복한 사주미래공작소 헤르메스 김미석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