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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자신을 성찰하며 써낸 참회록…신은경 안무의 항해(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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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자신을 성찰하며 써낸 참회록…신은경 안무의 항해(Voy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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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안무의 '항해'.
세상을 살아온 사람들은 코끼리가 된다/ 누구에게는 가파르게, 누구에게는 평온하게/ 예부터 이어져 온 길을 걷거나/ 범선에 몸을 싣거나/ 날틀에 기대거나/ 거친 고비를 넘기고/ 화평의 땅에 닿을 수 있음에 감사한다/ 거친 항해를 하면서/ 깨달음의 진전을 이루면서/ 물보라의 희망으로 커오는 찬란한 여명을 맞이한다/ 삶의 지혜를 가르치며 깨우쳐가는/ 이원(梨園)에 든 가을의 숙성/ 들어감의 느릿한 항해는 실체가 없는/ 그날 아침의 감동으로/ 포자와 진공의 세계로 들어선다/ 원컨대 바람대로 커가며 서로를 잊지 않는 희망으로 우뚝 서기를

2020년 10월 14일(수) 오후 8시, 이화여대 삼성홀에서 신은경(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발레전공 교수)․이화발레앙상블 주관의 옴니버스 발레 <항해> 공연이 있었다. 이날 저녁의 <항해>는 코로나바이러스가 침공한 가운데 조용하게 기도하듯 이루어졌다. 가을바람은 선선했고, 대한민국 최고 기량의 발레팀은 겸손하게 축적된 기교를 보여 주었다. 무대 위의 발레리나들이나 객석의 관객들이 서로 교훈적 실체를 찾아가는 경건함과 엄숙함이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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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안무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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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안무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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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안무의 '항해'.

안무가 신은경은 “항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대부분 무겁고 진중해지며 사뭇 비장해집니다. 앞에 맞닥뜨리는 거센 바람과 온갖 방해물을 해치우면서 목적지에 도달해서 진정한 삶을 펼칠 것이라는 신념에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사소한 일들로 엮어져 가는 인생의 항해에서 결코 놓쳐서 안 되는 것이 나침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라고 안무 의도를 밝힌다. 그녀는 이대 창학정신을 실천하고 있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다. 그녀의 나침반은 예수를 향해있다.

발레 <항해>의 구성은 문장 부호의 의미를 빌려 총 4개의 장(場)으로 이루어진다. 장마다 주님과 안무가 자신과 관련된 3개의 명제를 달고 춤은 전개된다. 1장; 느낌표(!, 호기심) 1. 창조 2. 시험 3. 탐욕 2장; 쉼표(,, 정거장) 4. 방탕 5. 광야 6. 고독 3장; 물음표(?, 나는 누구인가) 7. 절망 8. 회심 9. 만남 4장; 마침표(., 부르심) 10. 고백 11. 사랑 12. 소명에 이르는 12개의 에피소드를 독무와 군무의 조합을 구사, 촘촘히 엮은 서사 단편집 모습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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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안무의 '항해'.

일생에 걸친 긴 항해를 호기심과 시련, 성찰과 순종에 담아 간단명료하게 다루는 이화발레앙상블의 솜씨는 탁월하다. <항해>는 각기 중심인물이나 주제가 조금씩 다르지만, 인생 항로에서 겪게 되는 비일비재한 일들을 연결한다. 주제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느끼고, 쉬어가고, 질문하고, 마치는 과정이 묘사된다. 마지막 장에서의 마침표는 다음 문장을 새롭게 쓰는 소망의 행진이다. 영접하고, 일구고, 임무를 마치고, 떠나는 행위는 아름답고 숭고하다.
가을의 한 가운데에 서서 물들어가는 단풍을 바라보며 그녀가 이원을 떠난다는 것이 왠지 슬프게 다가온다. 이화여대를 발레로써 품격을 높인 장본인이고, 발레 예배와 <메시아> 하면 떠오르는 안무가 신은경, 그녀가 다시 그리운 이들의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화발레앙상블(1992년 창단) 삼 십여 년의 <항해>는 발레리나들의 얼굴을 익히게 해주었으며 그녀와 예수의 항해가 오버랩되며, 자신의 각오를 다지는 애절함이 담긴 품격의 발레단이다.

각 장(場)의 소제(小題)에 딸린 춤 연기력과 감정 전달의 또 다른 주인공은 음악이다. 마스크가 없는 세상에서 교향악단을 쓰고 우뢰와 같은 박수로 응원하며 즐길 공연을 기대하며 사용된 음악은 감동이다. 음악은 <항해>의 희로얘락에 걸친 격정의 움직임을 담아낸다. 이지혜는 조형곤의 창작곡을 사용함으로써 ‘광야’의 좌절감을 극대화한다. 의상은 클래식 발레부터 현대발레까지의 분위기를 수용하고, 조명은 기하학적 구성으로 시각적 비주얼을 현대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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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안무의 '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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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안무의 '항해'.

제1장 느낌표: 호기심(어느 날 갑자기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잃고 예기치 않는 낯선 세계로 떠나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1.창조: 세상은 흑암이 아니라 빛이었다.(출연-이정은, 김서희, 유지수, 이서연, 한지연, 박지현, 최유진, 정민아, 현민지) 2.시험: 네가 신이 되라, 사람들의 경배를 받아라(출연–노연경, 탁지현, 임지은) 3.탐욕: 다른 이를 짓밟고 올라서서 욕심을 채워라(출연–백연). 경쾌한 음악을 타고 군무는 이른 아침의 신비를 부른다. 푸른 나무 위를 나는 새들, 가르침을 받은 그곳에는 익숙한 구도의 유혹이 안개처럼 스며든다. 욕심을 상징하는 상자가 쌓이고, 욕심은 전이 된다. 산정(山頂)의 광휘가 시험받고, 검붉은 열정으로 뒤덮인다.

제2장 쉼표: 정거장(바람을 따라 회한과 반성의 계단을 오르내리며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몸부림친다.) 뜨거운 태양 아래 숨 막히는 위선과 고통이 뿜어내는 시간은 메마른 땅에 묻혀서도 속박되지 않은 삶과 자유를 갈구하게 한다. 4.방탕: 환락에 빠져있는 시간, 아버지는 그를 애타게 기다린다(출연-이한선, 유지수, 이서연, 한지연, 박지현, 최유진, 정민아, 현민지) 5.광야: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을 잃어가고 있다(출연-이지혜), 6.고독: 저 밑바닥에 이르러 신 앞에 벌거숭이로 서게 된다(출연–이지연), 짧은 치마의 현대인들의 일렁이는 욕망을 담는다. 의자는 욕망으로 가는 또 다른 상징이다. 파도 소리가 들리고, 천둥이 친다. 비닐이 바지락 거리는 소리, 뱀이 허물을 벗는 소리 같다. 독일 가곡이 방탕의 결과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함을 비탄하며 등장한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뒤의 고독은 처절하게 쓰라리다. 낭비해서는 안 될 풍요로움이여! 청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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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물음표: 나는 누구인가?(문이 보인다. 여기가 어디인가?) 거칠게 몰아치는 허울의 파도에 자신을 던지며 상실과 허무에 반항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떠내려가는 방랑자에게 사랑과 희망의 문이 열린다. 7.절망: 시간과 영원의 조합이 깨어지고 생명의 불길이 꺼져간다.(출연–강민지) 8.회심: 나를 부르는 세미한 신의 소리가 들린다(출연–임지은) 9.만남: 마음의 문을 열어주렴, 나는 네 앞에 있다(출연-김하예린), 장이 시작되기 전에 추억을 부르는 피아노 사운드에 맞추어 동영상이 들어오고, 이화발레앙상블의 공연 장면과 현장 스냅, 그리운 얼굴들이 젊은 모습들로 보인다. 그 분위기를 두고, 나를 찾아가는 작업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감사의 기도와 연결된다.

제4장 마침표: 부르심(빛이 보인다.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거룩한 자리가 보인다. 비어있어야 할 신성한 공간을 부질없는 욕망으로 채웠던 허기지고 참담한 모습이 보인다. 홀로 내던져졌던 모래 위에서 다시 일어나 거룩한 땅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10.고백: 내 주는 살아 역사하신다(출연–이은미) 11.사랑: 나에게, 우리 모두에게 첫눈처럼 좋은 소식이다. 사랑이 여기 오셨다(출연–김정은) 12.소명: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출연-무용수 전원), 고백에 응답을 준 춤, 그 은혜에 감동하며 추는 경쾌한 춤에 세 번째 가곡이 들린다. 높은 키라이트로 피날레를 알리며, 모습은 변했어도 마음은 더욱 강건해진 시간의 승리자를 축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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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은 ‘이화발레앙상블’을 통해 <메시아>, <탕자>, <욥> 같은 명작을 직조한 이화의 광휘(光輝)이다. 발레의 교육적 역할을 강조하면서도, 제자들의 현대발레에 대한 열정을 격려했다. 늘 빛을 경계한 그녀는 내면의 밝은 빛을 보고 부질없는 욕망을 좇지 말라고 가르쳤다. 발레 <항해>는 안무가의 마음을 거울 위에 들어내 놓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자는 다짐이다. 적절한 시기에 꼭 축하해줄 사람들이 모여 관람한 공연은 조촐하고 편안한 추수감사절 만찬 분위기였다. 앞으로도 이화발레앙상블이 격조의 창작품을 내고, 고정 레퍼토리를 보여 주는 데에 신은경 교수 많은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글 장석용 글로벌이코노믹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이화발레앙상블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