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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여유] 시집 뒤표지 글 모아 독자와 통찰의 시간 나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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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권의 여유] 시집 뒤표지 글 모아 독자와 통찰의 시간 나눠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시의 말/ 문학과지성사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 시의 말/ 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이 통권 600호를 펴낸다. 두꺼운 테두리를 두른 단색의 배경, 투박한 제목자와 단순한 필치로 그려진 시인의 선화 초상이 특징적인 위 시리즈는 1978년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를 시작으로 반세기 동안 한국 현대 시의 역사를 기록해 왔다. 아이코닉한 표지 이미지는 50년간 조금씩 변주되며 계승돼 어느덧 한국인들이 ‘시집’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보통 명사가 되었다.

문학과지성사가 시인선 600호 달성을 자축하며 펴낸 기념 시집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는 형식이 독특한 책이다. 흔히 도서의 뒤표지 영역에는 책의 소개나 추천사를 인쇄하는 게 보통이다. 그러나 문학과지성 시인선은 뒤표지 영역의 활용을 시인에게 일임해 그가 시집에 미처 담지 못했던 말을 이어 실을 수 있는 지면으로 확장해 사용해왔다. 그간 시인들은 새롭게 주어진 이 공간에 응축된 한 문장을 싣기도, 빼곡한 산문을 쓰기도,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를 올리기도 하며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세계를 보여줬다.
‘시는 나를 끌고 당신에게로 간다’는 이 뒤표지의 글들을 한데 모은 책으로 501호부터 599호까지 지난 99권의 시적 실험을 갈무리한다. 출판사는 이번 책을 펴내며 “이 뜻깊은 작업을 통해 시적 언어의 탄생과 연관된 중요한 통찰로 이어지는 귀한 시간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한다”고 썼다. 책을 펼쳐 보면 산문과 시라는 이분법적인 경계를 넘어 독자에게 곧장 말을 걸어오는 시인의 언어를 만나는 독특한 읽기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 시 분야를 담당했을 때는 ‘문학과지성 시인선’에서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시집을 한 권 추천해 달라는 질문을 종종 받았다. 시만큼 독자와의 궁합이 중요한 장르도 없으니 가능하면 각 시집을 열어 시들을 직접 읽어보고 결이 맞는 시를 찾으면 좋겠지만 워낙 출간된 권수가 많은 만큼 선뜻 한 권을 고르는 것이 어려운 일이기도 할 것이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무난하게 권해온 시집은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이다. ‘입 속의 검은 잎’은 1989년 출간된 이래 20년 넘는 시간 동안 기복 없이 안정적인 판매량을 보여주며 기형도 시인을 향한 한국인들의 꾸준한 사랑을 증명했다. 시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동명 장편 영화가 있는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시로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는 유명한 구절로 끝난다. 결핍에 몸부림치는 외로운 청춘의 단면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며 청년들은 물론 젊은 시절을 추억하는 독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해당 시가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널리 애송되는 힘이 아닐까 싶다.

인체의 심장이나 조개의 진주처럼 시는 문학의 가장 핵심적이고 응축된 갈래다. 시는 그가 발원한 땅의 역사를 품고 오늘날에 도착한다. 보이지 않는 약자의 편에서 시대의 고통을 대변한다. 날카롭게 벼린 말로 묵은 언어를 끊고 새 언어의 가능성을 연다. 그러나 소설에 비해 시는 대중성이 부족한 탓으로 그동안 출판사와 시인의 가장 큰 과제는 무엇보다 생존이 될 수밖에 없었던 어려움이 있었다.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끊김 없는 한 획으로 한국 현대 시의 궤적을 그리는 시인선의 존재는 가히 한국 문학의 축복이라 할 것이다. 베스트셀러에 시집이 보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아질 그날까지 ‘문학과지성 시인선’의 약진을 바란다.

한지수 교보문고 인문·예술 MD


조용철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yccho@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