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은행, 일제 탄압 속에서 민족 자본으로 탄생한 최초의 은행
기네스 등재된 조흥은행, 일제강점기, 6.25도 이겨냈지만 외환위기에 쓰러져
‘금융보국(金融報國)’, 재일동포들로 부터 탄생한 최초의 순수 민간자본 은행
위기를 기회로…내재된 혁신 DNA로 새로운 도약 꿈꾸다
기네스 등재된 조흥은행, 일제강점기, 6.25도 이겨냈지만 외환위기에 쓰러져
‘금융보국(金融報國)’, 재일동포들로 부터 탄생한 최초의 순수 민간자본 은행
위기를 기회로…내재된 혁신 DNA로 새로운 도약 꿈꾸다
이미지 확대보기신한은행의 뿌리는 구 신한은행과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은행인 조흥은행에 기반을 두고 있다.
조흥은행은 일제강점기나 6.25 등 수많은 역경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이를 극복하며 척박한 이땅에 뿌리를 깊이 내려온 민족은행이다. 우리 민족의 역경을 함께 극복해온 민족사의 동반자이자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은행이다.
반면 신한은행은 태생부터 새로운 것에 도전해온 승부사의 역사를 지닌 은행이다. 낯선 환경에서 작은 규모로 시작했지만, 시대를 앞서간 전략으로 크게 성장한 은행이다. 특히 위기를 기회로 바꿔 거대한 은행으로 도약한 점이 특징이다. 현재, 두 은행은 한 몸이 돼 코로나19라는 새로운 위기를 극복하며 성장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조선시대, 은행에서 최초로 돈을 빌린 차주(借主)는 공교롭게도 대구의 한 상인이었다. 그는 한양(서울)에 올라와 필요한 물건을 사다가 돈이 부족해지자, 급전을 빌리고자 한 은행에 들렸다. 은행은 그의 신용도가 불투명하고 집과 땅 같은 담보물들도 한양(서울)이 아닌 대구에 있다보니 난감해 했다.
이때 상인이 급전을 빌리고자 담보물로 제안한 것이 그가 타고 한양(서울)까지 올라 온 당나귀였다. 고심 끝에 은행은 당나귀를 담보로 잡고 대출을 해줬다. 이후 은행원들은 귀한 담보인 당나귀를 보살피는데 애를 먹었고, 은행 임원은 업무용으로 이 당나귀를 타고 다녔다.
이미지 확대보기위의 전래동화 같은 이야기에 등장한 은행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인 한성은행이다. 해당 일화는 은행 담보대출의 효시로 알려졌다.
한성은행은 일반 금융업무 외에도, 정부 조세금을 수송하는 등 특수은행의 역할도 겸했다. 하지만 조세금의 연체·미납이 발생하자 정부는 1898년 조세금 취급을 정지시켰다. 이후 한성은행은 경영악화로 개점휴업 상태에 놓인다.
한성은행은 1903년 들어 다시 부활했다. 정부의 도움아래 황실과 정부 재산을 관리하는 공립한성은행으로 전환했다. 하지만 1905년 금융공황 탓에 일제 자본에 종속되기 시작했다. 급기야 1906년에는 주식회사 한성은행으로 변모한다.
이를 기점으로 한성은행은 세를 확장했지만, 1922년 이후 일본인이 은행 요직을 차지한데 이어 1928년에는 조선식산은행의 지배를 받는 등 민족은행으로서의 색깔은 흐려져 갔다. 이후 일제의 민족계 은행 통합정책에 따라 1938년 해동은행을 매수하고 1941년에는 경상합동은행을, 1943년에는 동일은행을 합병해 조흥은행으로 거듭난다.
◆숱한 시련에도 버텨낸 조흥은행, 외환위기에 쓰러져
이미지 확대보기1943년 10월 설립된 조흥은행은 ‘조선을 일으켜 세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뜻처럼 일제강점기, 6.25전쟁, 휴전 이후 경제성장 과정 등 우리 나라 근 현대사 격변기 속에서 각종 시련을 겪으면서도 민족 자본을 지탱해 왔다. 조흥은행은 역사의 산 증인인 것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조흥은행에 주어진 주요 업무는 일제가 남긴 재산을 관리하고 감정해 처리하는 ‘적산(敵産)’이었다. 해방 이후 신임 은행장에 오른 정운용 행장이 서둘러 미군정에게서 일제 잔재를 처리하는 대행기관 업무를 따냈던 것이다. 1953년에는 6.25 전쟁 발발에 따른 부산 피난 시절을 겪었다. 전시 상황 속에서도 조흥은행은 꿋꿋이 영업을 해 나갔다.
이미지 확대보기조흥은행은 코스피 시장 제 1호 상장 기업으로도 유명하다. 조흥은행은 1956년 3월 증권거래소에 국내 기업 최초로 주식을 상장했다. 1957년에는 민영화 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성장 국면에 돌입했다.
조흥은행은 1966년 총예금 160억 원을 돌파한데 이어 1977년에는 온라인 시스템 운영, 1982년에는 신용카드 업무 개시 등 국내 은행권을 선도해 왔다. 1995년에는 한국기네스협회로부터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으로 인증받았다.
이미지 확대보기조흥은행은 우리나라 격동기 역사속에서 한 축을 담당했다. 수많은 시련을 이기고 우리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이처럼 빛을 발해 온 조흥은행이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그만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1997년 초 한보·삼미그룹 등 국내기업들의 연쇄 부도 여파에 조흥은행이 입은 타격은 컸다. 정부의 공적자금 지원으로 가까스로 생존한 조흥은행이었지만 이후 터진 대우사태와 쌍용양회 부실은 결정적 치명타가 됐다. 조흥은행은 끝내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정부의 2차 금융구조조정에 의해 결국 2006년에 간판을 내린다. 이어 신한은행으로 흡수된다.
◆‘금융보국’, 재일동포들의 출자금이 모여 탄생한 최초의 순수 민간자본 은행
조흥은행을 인수한 신한은행의 뿌리는 1955년 오사카 지역 재일교포들이 설립한 ‘오사카흥은(大阪興銀)’이다. 오사카흥은을 소유한 재일교포들은 모국에 대한 투자를 원했다.
재일교포들은 1974년 교포들의 국내 투자를 위해 ‘재일 한국인 본국투자협회’를 설립했다. 1977년에는 신한은행의 전신격인 ‘제일투자금융’이라는 단자회사도 만들었다. 1981년에는 정부 지침에 따라 이희건 제일투자금융 회장을 중심으로 은행설립 인가를 요청했다.
이미지 확대보기이후 1982년 이희건 회장은 341명의 재일동포들의 출자금을 모아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순수 민간자본으로 탄생한 국내 최초의 은행인 것. 설립이념은 금융을 통해 조국의 경제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금융보국(金融報國)’이었다.
신한은행의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신한은행의 자본금은 은행 설립규정상 최소금액인 250억 원이 전부였다. 점포는 3곳, 임직원은 279명에 불과했다. 당시 ‘조상제한서’로 대변되는 5대 은행 대비 너무 작은 규모였다. 이에 신한은행이 내세운 차별화 전략은 ‘고객서비스’였다. 당시 은행은 관료조직 같은 분위기 였다. 고객서비스 개념이 희박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 신한은행은 점포에 들어서는 고객에 대해 전 직원이 기립해 큰 소리로 인사하며 맞이해 줬다.
이미지 확대보기직원이 고객을 찾아가는 이른바 ‘발로 뛰는 영업’도 정착시켰다. 당시 대출커미션 같은 은행의 고질적 폐습 근절에도 앞장서며 ‘깨끗한 은행’의 이미지를 고객에게 각인시키고자 노력했다.
당시 다른 은행들은 “은행 망신 다 시킨다”며 신한은행을 비난했다. 하지만, 현재 고객서비스는 모든 은행의 기본 원칙이 되었다. 그야말로 한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인 셈이다.
이같은 노력의 결과 신한은행은 설립 4년 만인 1986년 10월 총수신액 1조 원을 돌파했다. 이어 1994년 10조 원을, 2005년 기준 50조 원을 상회하는 거대은행으로 발돋음 했다.
일본의 선진 금융기법을 국내에 도입하는 데도 앞장섰다. 1991년에는 국내 최초로 PC뱅킹 서비스를 도입했으며 1993년에는 국내 최초의 무인점포도 개설했다. 1994년에는 텔레뱅킹과 PB(프라이빗 뱅킹) 서비스를 최초로 도입 했다.
이미지 확대보기성장을 거듭하던 신한은행에게 1997년의 외환위기는 기회였다. 몸집을 줄여 위기를 넘기기보다, 부실로 휘청이는 은행을 인수해 몸집을 키운다는 전략을 취한 것이다. 신한은행은 1998년 동화은행을 시작으로 2001년에는 제주은행을 인수했다.
이미지 확대보기이후 2001년 신한은행은 신한증권 등과 포괄적 주식교환을 통해 국내 최초의 민간 금융지주사인 '신한금융지주'를 출범시켰다. 2003년에는 국내 최고(最古)은행인 조흥은행을 지주사에 편입시켰고, 2006년에는 조흥은행을 합병해 통합 '신한은행'을 출범시켰다. 순식간에 자산 157조 원을 돌파하며, 자산 기준 국내 3위 은행으로 치고 올라간 것이다.
◆‘해외진출’과 ‘디지털 혁신’으로 새로운 도약 꿈꾸다
2006년 이후 신한은행의 주된 지향점은 ‘해외진출’과 ‘디지털 혁신’ 두가지로 압축된다. 특히 해외진출은 재일교포들이 주축이 돼 설립된 신한은행의 오랜 숙원이었다. 교포들의 금융적 어려움을 해소하겠다는 의지도 담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이에 신한은행은 2007년 캄보디아, 2008년 카자흐스탄과 중국, 2009년 캐나다와 일본, 베트남 등에 해외 점포와 법인을 연달아 개업하며 해외진출도 가속화 했다. 특히 재일교포와의 탄탄한 관계를 바탕으로 외국계은행의 무덤이라 불리는 일본에서도 입지를 굳혀가고 있다.
그 결과 지난해 신한은행은 해외법인을 통해 총 2341억 원의 순이익을 기록했다. 이는 2위인 하나은행(1437억 원)을 900억 원 가량 상회하는 압도적 수치다. 특히 올해 3월 기준 전 세계 20개국 161개에 달하는 압도적 글로벌 네트워크도 보유하고 있다.
이미지 확대보기디지털 혁신 부문에서도 신한은행의 성장세는 돋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신한은행의 슈퍼 앱 ‘신한 쏠(SOL)’의 월간 실사용자 수(MAU)이다. 올해 8월 기준 796만 명의 이용자를 보유해 ‘국민 앱’으로 거듭나고 있다.
신힌은행은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다. 특히 수신과 여신 부문에서 디지털 커버리지(Coverage) 성장이 돋보인다. 수신72.6%, 여신55.5%로 전년 대비 4%포인트, 8.9%포인트씩 늘었다. 디지털 커버리지는 총 신규 거래 건수 중 디지털 신규거래의 비중을 뜻한다. 디지털 거래가 은행 여·수신의 절반을 넘은 것.
이미지 확대보기신한은행의 현재 목표는 '고객의 생활 전반을 아우르는 플랫폼' 출시다. 그 일환으로 신한은행은 다음달 음식배달 앱 ‘땡겨요’ 출시를 앞두고 있다. 배달앱이라는 파격적 시도지만 신한은행은 수익이 아닌 '양질의 고객 데이터 확보'를 목표로 이 앱을 출시한다고 강조했다.
고객의 금융 정보는 물론 라이프스타일 관련 다양한 정보 및 신한은행의 노하우도 결합해, 실질적인 고객의 자산 증식을 돕고 차원이 다른 디지털 경험을 제공하겠다는 취지다.
진옥동 신한은행장은 “신한이 가야 하는 방향은 ‘고객과 미래를 신뢰로 이어주는 디지털 회사’다”며 “잘 세운 계획보다 더 중요한 것은 행동이다. 특히 고객을 중심으로 출발에서부터 각 과정에 걸친 정당성을 갖춰 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신민호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sho634@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