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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지 '얼레빗…'으로 하루를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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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편지 '얼레빗…'으로 하루를 연다

[생생인터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

"한국문화는 더불어 사는 삶이 특징"


10년 째 문화편지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1만여 명에 발송


독자 성원에 힘입어 '한국문화 전도사'로 쉬운 글쓰기·강의


우리문화사랑협회 발족…한국문화체험 한마당 개최가 꿈

▲한국문화의원형을찾아10년째탐사여행을하고있는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그는한국문화의특징은더불어사는삶이라며점차파편화되고개인화되어가는삶을'품앗이'정신을통해회복해야한다고강조했다.
▲한국문화의원형을찾아10년째탐사여행을하고있는김영조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그는"한국문화의특징은더불어사는삶"이라며"점차파편화되고개인화되어가는삶을'품앗이'정신을통해회복해야한다"고강조했다.
[글로벌이코노믹=노정용기자] 매일 아침이면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라는 제목의 유익한 문화칼럼이 누리편지(이메일)로 날아온다. 세시풍습, 국악, 한식, 24절기 등 쉽고 재미있는 한국문화 이야기가 ‘3단락의 1분 읽기’ 분량으로 1만 여명의 독자들에게 배달되고 있는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누리편지를 보내고 있는 화제의 주인공은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 김영조 소장(61). 그는 오늘 2470번째 누리편지로, 자그만치 2004년부터 19일 현재까지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은 말할 것도 없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성실하게 우편배달부의 역할을 하고 있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김 소장의 ‘얼레빗…’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누리꾼도 많다. 예약 전송이 잘못돼 아침 일찍 배달되지 않으면 “오늘 하루 살맛이 안 난다”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기도 한단다. 자신의 귀를 자른 불멸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나 영국의 전설적 팝 그룹 비틀즈는 잘 알면서 권세 앞에 굴복 안 하고 스스로 눈을 찌른 조선의 화가 최북이나 조선 최고의 명창 임방울을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10년째다.

한국 고유의 문화DNA를 ‘더불어 사는 삶’으로 꼽는 김영조 소장. 그가 내민 명함에는 휴대폰이라는 말 대신에 ‘손말틀’, 이메일이라는 말 대신에 ‘누리편지’로 되어 있을 만큼 한국문화와 한국어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자부심이 가득하다. 옛 조상들이 살았던 한옥에서 한복을 입은 채 한식을 먹고 국악을 들으며 우리 전통문화를 체험하게 하는 ‘한국문화 체험 한마당’ 개최를 꿈꾸는 김영조 소장을 만났다. <편집자 주>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에 대해 소개해 주시죠?

“우리 문화는 연구하면 할수록 참으로 대단하고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세계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가 왜 대중들에게 외면을 받고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를 만들었어요. 대중들이 우리 문화를 외면해온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과 강연자가 어렵고 재미없게 설명한 탓이지요. 그래서 한국 문화의 대중화를 위해 연구소를 설립하고 정보와 소중함을 동시에 알리는 한국문화 이야기를 쉽고 재미있게 펼쳐가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1990년초 다니던 회사까지 내던지고 우리 문화 연구활동에 매달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치열한 시민투쟁이 펼쳐졌던 1980년 후반까지 중소업체에 다니면서 고민이 하나 있었어요. 지금의 어린 아이들이 성장해서 ‘당시 아버지는 무슨 일을 했어요?’라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라는 고민이었어요. 아이와 집사람까지 포함해서 한겨레신문 창간주주 활동을 시작했고, 참교육학부모회 활동 등 다양한 시민활동에 가담했어요. 다니던 중소업체의 사장님은 제가 하는 일을 존경한다고 말은 하면서도 혹시 피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고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고민 끝에 기업에 피해를 줄 필요도 없고 제가 하고 싶은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자는 생각에서 미련없이 회사를 그만두었지요. 호구지책으로 생활한복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IMF가 불어닥친 1997년 당시에는 생활한복업체가 7개 밖에 없었어요. 정부에서 한복입기를 장려하면서 업체들에게 전시판매 기회를 줘 사실 재미를 좀 보았지요. 비록 생활한복이라 하더라도 저는 고름과 대님을 살리는 등 한복다운 한복을 만들자는 생각이 강했어요. 말하자면 정통한복이든, 개량된 생활한복이든, 한복의 정신이 고스란히 살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당시 생활한복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는데 장사가 안 되어 고전하던 평화시장의 업체가 모방하기 시작하면서 500개 업체로 늘어나 망할 수밖에 없었어요. 더군다나 한의사협회와 공동으로 한의사 진료복을 개발했는데 결국 채택을 안 해주는 바람에 2004년 카드대란과 함께 사업체의 문을 완전히 닫다시피 했습니다. 어려움을 겪으면서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고민하던 중 제가 좋아하는 ‘우리 문화 알리기’에 전념 해야겠다고 결심했어요. 2004년부터는 과거의 영광을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 매일 아침 누리편지로 독자들에게 문화편지를 보내기 시작했어요. 결국 그게 저를 살렸어요. 직업을 포기하는 배수진을 치고 죽기살기로 하니까 조금씩 돌파구가 생기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어요. 물론 여전히 수입이 규칙적이지 못하고 시원치 않아 여유 있게 살 순 없지만 한국 문화를 대중화 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갑니다.”

-한복은 언제부터 입기 시작하셨는지요?

“90년대 초부터 생활한복을 입었어요. 그때만 해도 한복을 입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어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를 동물원 원숭이를 보듯이 했어요. 한국 문화를 사랑하고 알리는 일을 하면서 한복을 입는데 남의 눈치를 보면 되겠느냐는 생각에서 소장한 양복을 모두 남에게 주고 배수진을 쳤어요. ‘당신은 한국인이면서 서양옷을 입는데, 한국인이 한복을 입는 게 뭐가 이상하냐?’며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했어요. 20년 가까이 생활한복만 입다보니까 지금은 어쩌다 점퍼를 입으면 사람들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놀려요. 옷처럼 문화도 하나의 습관이에요. 광복이후 우리 문화를 놓아버리고 서양문화를 습관적으로 받아들이다 보니 우리 문화가 왜곡되고 천대받게 됐지요. 한복도 안 입고 우리 음악도 안 들어보니까 한국 문화는 어렵고 불편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우리 음악 중 ‘수제천’이라는 궁중음악이 있는데 외국인이 듣고는 천상의 음악이라고 찬사를 보내지만 정작 우리 국민들은 한 번도 접해보지 않고 어렵다고 하지요. 먼저 보고 깨달은 문화인이 나서서 쉽고 재미있는 말로 대중을 이끌어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대중들이 전통문화를 저버리고 서양문화에 빠져들게 됩니다.”

-지난 2004년도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1만여 명에게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를 누리편지로 보냈는데, 소재 찾기가 어렵지 않으셨나요?

“지난 10년 가까이 문화편지를 보내는 동안 가장 힘든 일이 자료를 구하는 일이었어요. 아무리 좋은 소재라 하더라도 3단락으로 소화할 수 없는 아이템은 과감히 버렸어요. 독자들에게 1분이라는 시간을 투자해달라고 하면서 너무 길거나 재미없는 그리고 유익하지 않은 내용을 넣을 수는 없으니까요. 또 하루는 복식, 하루는 먹거리, 하루는 세시풍습 등 지루하지 않도록 주제를 바꾸어가며 소화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어요. 일차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을 참조했는데, 번역본임에도 번역되지 않은 곳이 많아 힘들었어요. 또 요즘 누리꾼들이 자료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뒤지지만 사이버공간에는 검증되지 않은 엉터리 정보가 많아 사실 참고할 만한 게 거의 없었어요. 그러다 보니 국회도서관이나 국립중앙도서관을 찾거나 지방의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하고, 심지어는 일본과 중국을 방문해 자료를 구하기도 했어요.”

김 소장이 글을 쓰기 시작할 무렵 주변에서 ‘석 달이면 바닥 날 텐데 무모한 짓 하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그러나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린 덕분에 1000회가 넘어가자 사람들이 하나둘 손을 들고 인정하기 시작했다.

“한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전문가와 학자들이 저를 나름대로 대우해주더라구요. 모 대학 국어학과 학장님이 ‘~하는 것 같아요’라는 어투를 사용하길래 이처럼 우리말을 왜곡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지요. 처음에는 겸양의 표현이라고 하시더니, 학문하는 사람으로서 인정을 한다고 하셨어요.”

-한국 문화를 알리는 활동을 하면서 재미난 일화도 많았을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숙명여대에서 열린 국제 한복세미나에 토론자로 참여했어요. 놀라운 일은 참석자 100여명 가운데 한복을 입은 사람이 저 혼자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에요. 토론시간에 첫 발언으로 ‘한복 관련 세미나를 수백 번 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한복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한복을 안 입으면서 국민에게, 그리고 외국인에게 한복을 입으라고 권하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발언을 했지요. 또 대통령에게 한복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는 행사를 광장시장에서 연다고 해서 갔는데, 행사 참가자의 2/3가 한복을 안 입고 있었어요. 이처럼 우리 문화를 다루는 사람의 정신이 썩어 있어요. 이런 점이 굉장히 못마땅하고 개탄스러워요.”

김영조 소장은 국악이나 국어학과 관련된 세미나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남아 듣는 청중으로 유명하다. 그뿐이 아니다. 그는 뒤풀이 장소에까지 쫓아가 세미나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러한 노력 덕분에 평범한 자리에서는 절대 들을 수 없는 학계의 내밀한 이야기와 함께 무형문화재급 인사들과 자연스런 인맥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화편지를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저도 사람인데,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솔직히 거짓말이지요. 목숨을 걸다시피 하고 뛰어들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어요. 처음 시작할 때 아파서 쓰러져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다행히 큰 병은 안 걸렸어요. 하지만 계단을 오르다가 사물이 이중으로 보이는 등 위기도 찾아왔어요. 무엇보다 오늘의 저를 만든 건 순전히 큰 박수를 보내준 독자들의 성원과 격려 덕분입니다. 충남 예산의 한 독자는 ‘얼레빗…’을 보는 재미로 사는데 왜 아직 편지가 안 오느냐고 해 정신이 번쩍 들게 해주었어요. 예약 전송을 눌러놓았는데, 잘못해가지고 전송이 안 되는 바람에 항의(?) 전화를 받기도 했지요. 이처럼 편지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독자들의 성원이 저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편지를 쓰게 한 원동력이지요.”

-그러면 언제까지 문화편지를 쓸 작정이신가요?

“글에는 정년이 없잖아요. 정신줄만 놓지 않는다면 죽을 때까지 자판을 두드릴 생각이에요. 10년 간 한우물을 판 덕분에 독자들에게 소개할 소재는 무궁무진하다는 걸 발견했어요. 소재를 찾기 위해 종종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나 책을 보는데, 어떨 때에는 내용을 빨리 소개하고 싶어 흥분이 됩니다. 최근 방영된 1시간짜리 종갓집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4~5개의 소재를 건졌어요. 종갓집을 찾아 지방을 한 번 돌아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의 관점에서 단행본을 출간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

-서울시가 지원하는 서울문화강좌를 개설해 강의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수강생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2010년과 2011년 두 해는 수강생을 모집하기가 어려웠고, 2012년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어요. 처음에는 서울문화에 대한 개념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수강생을 힘들게 모았으나 지난해에는 강의공고가 나가자마자 70명의 수강생이 몰려들었어요. 변호사, 기업의 최고경영자, 대학 명예교수까지 수강생으로 등록해 서울문화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됐다고 했을 때 큰 보람을 느꼈지요. 매주 월요일 저녁에 강의를 했는데, 수강생들은 휴일 다음날 생기는 월요병이 없어졌다고도 하고, 월요일이 기다려진다고도 했어요. 한 학기를 마친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모임을 갖고 있으니 성공한 강좌인 셈이지요. 덤으로 동국대 평생교육원에서 연구소와 함께 강좌를 개설하자고 제의가 오는 등 수강생 모집에 대한 고민도 사라졌어요.”

-한국문화를 소개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전통문화가 있다면….

“사실 간직하고픈 한국문화가 너무 많아 딱 하나를 꼬집으라면 할 수가 없어요. 조선시대 선비가 새해나 새학기 때 덕담이나 교훈이 되는 내용으로 ‘쇄소응대’를 공부했어요. 쇄소응대란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마당을 쓸며, 웃어른의 말씀을 공손히 듣는 정신으로, 효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지방문화원에 가면 대부분 효를 중심으로 강의한다고 하지만 효는 강조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역사 속 효자 이야기를 통해 자연스럽게 우리 문화의 더불어 사는 정신을 가르쳐주어야 해요. 글에서도 독자들에게 잔소리를 하기보다는 공감하는 내용으로 쓰다가 글 끝에 제 생각을 살짝 붙입니다.”

-요즘 한류를 보면 생각이 남다를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시는지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걸 보면서 굉장히 기분이 좋았어요.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세계 강대국이 되긴 힘들지만 문화로는 강대국이 될 수 있어요. 싸이가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다만 아쉬운 건 그런 바탕에 우리 전통문화를 깔고 했더라면 완벽하고 알차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에요. 뮤지컬이나 영화를 하더라도 우리 문화에 대한 끄나풀을 놓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 대중문화에서 일하는 분들이 우리 문화를 접해 보지 못한 탓에 활용 못할 뿐이지 응용할 수 있는 전통문화가 다양하게 있어요. 미력하나마 기회가 주어진다면 세계인들이 공감할 한국문화를 접목시킬 수 있도록 도와줄 생각입니다.”

-한국전통문화를 사랑해온 사람으로서 한국문화를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한국문화는 한 마디로 더불어 사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글을 쓰고 자료를 검토하면서 ‘더불어 사는 삶’의 다양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물론 다른 민족이 더불어 살지 못한다는 건 아니지만 한국문화 곳곳에 더불어 사는 정신이 숨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입춘 때 ‘적선공덕(積善功德)’이라고 해서 적선공덕을 하면 1년 내내 액땜을 할 수 있다고 하고, 심지어 상여소리에도 ‘살아생전에 적선공덕 행위를 했느냐’고 질문하며 염라대왕의 심판과 연결시키기도 하지요. 또 우리가 생활하는 한옥에는 마당-대청-뒤뜰이 대류현상으로 사람과 자연이 소통하게 하는가 하면, 먹는 음식에도 몸에 좋은 오방색으로 고명을 얹는다거나 몸에 옷을 맞추는 서양옷과는 달리 한복은 옷에 몸을 맞추게 하지요. 이 모든 것들이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사는 한국문화의 특징입니다.”

김 소장은 한중일 문화의 차이와 관련, 중국과 일본이 폐쇄적인 문화라면 한국은 자연과 함께하는 더불어 사는 열린 문화라고 진단한다. 흔히 자금성과 경복궁을 비교하면서 경복궁이 자금성의 화장실만 못하다고 하지만, 경복궁이 일본에 의해 부서지고 망가져 7000칸에서 1000칸으로 줄어들어 규모가 작게 보이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더더구나 규모도 원래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황제만을 위한 폐쇄구조의 자금성보다는 백성과 더불어 복을 누린다는 경복궁의 열린구조를 안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고 그는 설명한다.

-비틀즈는 알아도 임방울은 모르는 우리 세태에 대해 한마디 해주시죠?

“제가 어디 가서 강의를 할 때는 이 이야기로 시작해요. 한국문화에 대해 너무 모른다고 면박을 주거나 나무라면 그들을 더 우리 문화와 멀어지게 하지요. 그래서 ‘여러분, 비틀즈를 좋아하십니까?’라고 물은 다음에, ‘저도 굉장히 좋아합니다. 팝송 예스터데이를 듣고 베토벤의 5번 교향곡 ‘운명’은 원판 5장을 구해 비교하며 들었습니다.’고 말해요. 그러면 사람들은 ‘아, 이 사람 국수주의자는 아니구나’ 하고 느끼며 제 말을 수긍하기 시작하지요. 요즘 음반 잘 파는 사람이 10만장 정도인데, 일제 강점기 때 유성기판으로 120만장 판 사람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은 깜짝 놀래요. 명창 임방울 선생이 주인공이지요. 서양요리책이나 서양백과사전만 있는 줄 아는데 우리나라에도 전통요리책 ‘수문사설(謏聞事說)’과 이규경의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가 있었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이 같은 기초 상식을 가지고 있어야 국제화 시대에 외국인을 만나더라도 당당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

-우리 문화 가운데 가장 관심이 있고 조예가 깊은 부분은?

“다 잘 알지 못하지만, 몇 개 고르라면 역시 국악과 우리말이에요. 저도 많이 공부합니다. 일본에서 토박이말을 연구하시는 분은 두 살 때 일본에 가셨지만 우리보다 더 철저하게 우리말을 사용하고 빛내고 계세요. 처음 일본에서 만났을 때 명함에 ‘손말틀’이라고 써놓은 걸 보고 커다란 충격을 받았어요. 제 나름대로 남들이 휴대폰이라고 쓸 때 우리말로 순화한다며 ‘손전화’라고 자랑스럽게 썼는데 ‘손’은 순우리말이지만 ‘전화’는 한자어잖아요.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손전화’를 ‘손말틀’로 바꾸고 ‘이메일’은 ‘번개편지’로 해야 하는데, 너무 앞서가는 것 같아 널리 통용되는 누리꾼(네티즌)의 편지라는 의미에서 ‘누리편지’로 바꾸었습니다.”

-글을 쉽게 쓰고 소통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쉽게 쓰려고 노력한 결과 이젠 습관이 됐어요. 한자말을 쓰는 대신 가급적 순우리말을 쓰려고 애를 씁니다. 예컨대 ‘변제(辨濟)’라는 말은 간단히 ‘빚갚다’라고 쓰고, ‘전개했다’도 ‘펼쳤다’고 하면 누구나 다 알게 되지요. 이처럼 단어나 낱말 하나라도 초등학교만 나오면 이해할 수 있게 골라서 쓰겠다는 신념을 갖고 노력합니다. 우리말을 쉽게 쓴다는 것도 의지가 있어야 고쳐지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면 절대 고칠 수가 없어요. 쇼핑몰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인 ‘적립금’이나 ‘마일리지’ 대신에 ‘콩고물’이라는 말을 썼더니 젊은이들이 재미있고 신기해해요. 똑같은 뜻이 아니라도 비슷하면 다 알아듣는 것이지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2010년에 서울시에 비영리법인으로 우리문화사랑협회를 등록했어요. 장차 사단법인으로 바꾸어 많은 사람이 우리문화를 사랑하는데 동참할 수 있도록 할 작정입니다. 지금 당장은 형편상 좀 어려울 것 같지만 더 나아가 우리문화 체험 한마당을 만들어 ‘우리 문화, 역시 좋구나!’하고 온몸으로 느끼는 난장을 꾸리는 게 저의 마지막 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