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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망신’ 아닌 ‘자녀 보호’ 관점서 접근하는 인식 전환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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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 망신’ 아닌 ‘자녀 보호’ 관점서 접근하는 인식 전환 필수

[힐링마음산책(312)] 근친 성폭력의 문화심리학적 해석
서울역에서 열린 2014 성폭력 추방 주간 캠페인에서 경찰 관계자들이 피켓을 들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진=뉴시스이미지 확대보기
서울역에서 열린 2014 성폭력 추방 주간 캠페인에서 경찰 관계자들이 피켓을 들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사진=뉴시스
최근 50대 아버지가 친딸을 미성년자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성폭행해 임신까지 시킨 사건이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다. 피해자는 수년간 침묵을 강요당하다가 병원에서 임신 사실이 밝혀진 후에야 "아버지가 그랬다"고 말할 수 있었다. DNA 검사를 통해 확인된 끔찍한 진실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어두운 현실을 여실히 드러낸다.

심리학자로서 이런 사건을 접할 때마다 가장 안전해야 할 공간인 가정이 어떻게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2023년 5월에도 이혼 후 10년 이상 만나지 않은 친딸을 불러내 성폭력을 저질러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딸이 남긴 범행 당시 녹음 파일에는 "아빠, 아빠 딸이잖아. 아빠 딸이니까"라고 애원하는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가해자가 징역 5년을 선고받은 직후 "왜 내가 유죄냐, 말도 안 된다"라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시사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자료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자의 84.3%가 가해자를 이미 알고 있었다. 우리가 막연히 상상하는 '어두운 골목의 낯선 가해자'는 현실과 거리가 멀다. 실제로는 거의 대부분의 성폭력이 면식범에 의해 저질러진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13세 이하 아동 피해자의 절반 이상이 친족에 의한 범행이라는 점이다. 구체적으로는 친형제 27.6%, 사촌 23.7%, 친부 19.7% 순이었으며, 범행 장소의 21.8%가 가정집이었다. 이러한 통계는 '안전한 보금자리'라는 가정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뒤흔든다.

이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다. 올해 1월 인도에서는 친할아버지·친아버지·친삼촌이 14세 소녀를 약 1년간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 비교 연구들은 근친 성폭력이 문화권을 초월한 현상임을 보여준다. 다만 신고율과 공식 통계는 문화적 요인에 따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근친에 의한 성폭력이 동양에만 국한된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하지만 개인의 권리를 중시하고,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교육을 어렸을 때부터 받는 서양이 동양보다 그 발생 빈도가 적을 뿐이다.
문화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은 가족 구성원 개인이 권리를 강조하기보다 집안의 '체면'을 중시한다. 이런 문화에서 근친에 의한 성폭력을 개인의 일탈로 인정하고 합당한 처벌을 하기보다는 집안의 체면을 더욱 소중하게 여겨 피해자의 입을 막는 강력한 심리적 장벽을 형성한다. 피해자는 내재화된 가치관에 의해 자신이 말하는 순간 가문 전체에 수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두려움을 느끼고 침묵하게 된다. 상담 현장에서 중년 여성들이 어린 시절 친척에 의한 성폭력을 고백할 때 공통적으로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마라. 너만 입 다물고 있으면 집안이 편하다"라고 입막음을 당했다고 말한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이런 말을 피해자를 보호해야 할 어머니가 했다는 점이다. 이는 피해자를 심리적으로 두 번 옭아매는 상처가 된다.

이러한 메시지는 표면적으로는 가족의 결속을 강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범죄를 은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믿었던 가족에게 배신당했다는 아픔과 세상에서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없다는 절망감을 동시에 안겨준다. 가족을 보호하려는 선한 의도가 역설적으로 가해를 지속시키는 메커니즘이 되는 것이다.

발달심리학에 따르면 아동은 주 양육자와의 신뢰 관계를 통해 안전감, 자율성 그리고 자아 정체성의 기반을 형성한다. 보호자가 가해자가 되는 순간, 피해자는 단순한 신체적 피해를 넘어 기본적 신뢰 체계의 붕괴를 경험한다. 이러한 상처가 회복되지 않으면 성인이 된 후에도 지속적인 관계 형성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관계적 배신 트라우마의 특성이다. 자신에게 가해진 폭력에 대해 저항하고 그 감정을 인정받지 못할 때 피해자는 그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며 죄책감을 갖게 된다. 저항할 수 없는 권위자에게 당한 폭력은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잘못을 했을 것'이라는 자기 비난으로 이어진다. 만약 주위 사람들에게 그 아픔을 인정받지 못하고 침묵을 강요당하면 결국 '내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자기 비난이 더욱 굳어진다. 이는 성인이 된 후에도 우울, 불안, 대인 기피, 친밀감 회피 등으로 이어진다.

실제 상담 현장에서 이런 피해를 당하고도 오랫동안 괴로워한 내담자에게 많이 들려주는 말 중 하나가 "그것은 네 잘못이 아니야"다. 안타깝게도 상담 초기에는 이 말에 저항하는 내담자들이 많다. 그만큼 오랫동안 자신의 잘못이라고 여겨 자기 처벌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증거다.

근친 성폭력 피해자를 위한 상담은 심리적·신체적·사회적·법적 회복을 모두 고려하는 통합적 접근이 필요하다. 피해자는 일반적인 성폭력 피해자와 달리 가족관계 안에서 사건이 발생했기 때문에 배신감·죄책감·고립감이 특히 강하며, 가족의 지지를 얻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성 문제에 대해 남녀에게 다른 도덕적 기준을 적용하는 유교적 전통이 남아있는 사회에서는 근친 성폭력 피해자가 '내가 잘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왜곡된 인식을 갖기 쉽다. 몸이 더럽혀졌다는 느낌이나 순결을 잃었다는 자기 비난과 죄책감이 강할 수 있어 더욱 섬세한 접근이 요구된다.

근친 성폭력을 예방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변화가 필요하다. 첫째, 가족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진정한 가족의 힘은 침묵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는 데 있다. 가족 내 폭력뿐만 아니라 데이트 폭력, 이혼한 전 배우자나 헤어진 연인에 대한 폭력도 한때 사랑했던 관계라는 이유로 용서하는 문화가 변해야 한다. 폭력은 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도 폭력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둘째, 가족 안에서도 각자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도록 교육받아야 한다. 근친 성폭력은 가족 내 어른들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라는 교육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아무리 나이가 어리더라도 자신의 감정이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히도록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

셋째, 가부장적 가족문화의 변화가 필요하다. 남성과 아버지에 의한 폭력을 가족을 위한 것이라고 미화하고, 여성은 참고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라는 가치를 심어주는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 이러한 문화적 편견은 법적 판단에서도 남성에게 유리한 판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 형법과 아동·청소년 관련 특별법에 따르면 친족 간 미성년자 대상 강간은 일반 강간죄보다 훨씬 무겁게 처벌된다. 친족이 미성년자를 강간한 경우 최소 징역 10년 이상, 가중처벌 시 15년 이상 또는 무기징역까지 가능하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사건에서 보듯이 가해자가 범행을 부인한다는 이유로 친족관계에 의한 강간 혐의가 아닌 강제추행 혐의만 적용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결국 자신을 믿지 않는 사회와 법체계에 절망한 딸은 "직계존속인 아버지에게 성폭력을 당했다"는 내용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근친 성폭력을 둘러싼 침묵을 깨는 것은 법적 개혁이나 임상적 개입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는 가족·문화·보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전환하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유교적 전통이 가족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도 여성들에게 순종을 미덕이라고 가르치고, 정조 관념을 여성에게 내재화시킨다. 이런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하고도 수치심과 죄책감 때문에 신고하지 못하고 평생 가슴앓이를 하며 살아간다. 특히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자기를 보호해줄 것으로 믿었던 아버지를 비롯한 친족에게 성폭력을 당했을 경우에 느끼는 분노와 절망감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교육 현장에서는 아동들에게 '좋은 접촉'과 '나쁜 접촉'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치고, 성인에게는 아동의 '싫다'는 표현을 존중하도록 교육해야 한다. 특히 가족 내에서도 개인의 경계선이 존중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부모 교육을 통해 자녀가 성폭력 피해를 당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해야 한다. '집안 망신'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자녀 보호'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또한 피해자가 용기를 내어 사실을 공개했을 때 직면하는 사회적 반응은 회복 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거나 낙인을 찍는 등의 2차 가해를 근절해야 한다. 사회적으로는 신고를 활성화하기 위한 안전망 구축이 필요하다. 피해자가 신고했을 때 보복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고, 경제적·사회적 지원을 제공해야 한다. 또한 가해자에 대한 일관된 처벌을 통해 범죄의 심각성을 사회에 알려야 한다. 수치심과 죄책감을 딛고 진실을 공개할 용기를 낸 피해자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한 안전은 존중과 동의, 배려에 기반한 관계에서 나온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이미지 확대보기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명예교수는 국내 긍정심리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미국 심리학을 중심으로 하는 기존 심리학이 문화의 영향력을 경시하는 것을 비판하고 인간 행동에 미치는 문화의 중요성을 설파하고 있다. 특히 한 교수는 심리학 전공자가 이론보다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소통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기업체, 대학, 교회 등을 찾아다니며 몸 건강 못지않게 마음의 건강이 중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저서로는 '심리학자의 마음을 빌려드립니다' '문화심리학' '신명의 심리학'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성공적 삶의 심리학' '노년기의 의미와 즐거움' '남자 나이 마흔이 된다는 것' 등이 있다.


한성열 고려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