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작 연대기(67)] 이승주(한국무용가,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일무·승무 이수자, 태평무 전수자)의 춤 탐구
이미지 확대보기기획·안무·연출·출연을 감행한 평인 이승주는 기억과 마음을 춤으로 풀어낸다. 안개 저 너머로 되살아나는 순간들, 그것을 품어내는 마음이 춤에 담긴다. 정형의 춤사위는 촘촘한 디테일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키며, 리듬의 미세한 결을 읽어내는 감각의 우수성이 돋보인다. 무대는 문(門)을 통해 경계를 드러낸다. 흑(黑)과 백(白)의 공간은 이승과 저승, 현실과 기억, 과거와 현재를 경계한다. 무용수는 이 문을 넘나들며 기억을 불러오고, 춤의 몸짓으로 재생한다.
관객은 ‘기억의 문’을 바라보며 함께 건너가는 듯한 느낌을 공유한다. 이 과정에서 춤은 무대와 호흡하는 하나의 언어가 된다. 무용수는 순간적인 확장과 수축을 통해 공간을 재구성한다. 공간은 춤의 궤적에 따라 끊임없이 변주되고, 의미를 이식하는 몸짓은 문을 중심으로 빛과 그림자를 교차시키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무대와 춤이 서로를 비추고 조응하면서, 경계의 의미는 더욱 깊어진다. 춤은 전통무용의 품격을 계승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불어넣는다
안무자는 호흡 자체를 조형적 요소로 활용하여 춤의 결을 빚어낸다. 같은 맥락으로 음악은 전통 음(音)에 뿌리를 두되, 한국화의 여백처럼 소리를 덜어내고 소수의 악기만으로 절제된 울림을 만들어낸다. 공간을 가득 메우지 않아도, 깊은 울림은 생겨나며 기억과 마음의 결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통의 답습과 원본의 계승은 필수적이지만, 문화 원형은 무대, 의상, 빛, 음악 등의 현대 문명에 의해 변형되고 서정적 연속성이 확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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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평인 이승주의 '기억의 몸짓, 결'은 1장. ‘의식의 문’, 2장. ‘기억의 결’, 3장. ‘송신의 춤’으로 구성된다. 추억의 사진첩을 열면 가을 운동회의 콩주머니 던지기로 눈물이 솟아오를 듯한 분위기가 조성된다. 안무가는 무대 공간 자체를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활용한다. 그 공간에 코스모스밭 스펙트럼이 들어서고, 작은 몸짓에도 격려하고 웃어주던 사람들이 기억 속으로 흩어진다. 시선, 동선, 순간적인 정지 미학이 어우러져 시간과 공간의 밀도를 가중한다.
‘의식의 문’ : 이승과 저승, 기억과 현실을 경계하는 문, 한 걸음 내딛는 순간, 빛이 몸을 따라 번지고, 잊힌 이름들이 바람처럼 되살아난다. 빛의 경계는 집중을 불어오며, 신체 움직임과 리듬이 내적 의식의 심미적 수사로 작용한다. 경험의 질감 위에 ‘춘앵전’의 봄빛이 투영되고, 검무는 경험을 미학적으로 끌어 올린다. 그리움은 추억의 파편을 이어 붙이며, 무대는 사유와 감각을 조용히 기원의 제단에 바친다. 문은 그렇게, 조용히 열리며 기억 속 세계로 이끈다.
‘기억의 결’ : 기억은 모양이 없지만, 부드러운 질감의 기억은 따스한 온기와 함께 유년에서 현재를 잇는다. 기억은 속삭이고 빛깔의 변화이며 움직임으로 피어난다. 장고춤은 감각적 잔여를 탐구하고, 부채춤은 망각의 흔적을 불러온다. 그리움의 서사는 늘 미완으로 풍경의 여백을 남긴다. 비어 있는 공간이 더 많이 떠올리게 한다. 시간의 거리감 속에서 함께한 자와의 삶이 되살아난다. 안무가는 개인적 경험으로 장(場)을 심화시키고 정서적 공감대를 형성한다.
‘송신(送神)의 춤’ : 불러온 혼을 돌려보내며 신성한 세계와 속세의 경계가 다시 닫힌다. 초청(청신)–교류–송신의 구조 속에 살풀이춤의 긴 자락은 떠나간 이를 향하고, ‘잘 돌아가시라’를 행위로 청한다. 이별은 잊음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함께 있음을 모색하는 과정이다. 춤은 보내는 이의 마음을 감각화 한다. 춤은 기억과 감각 속에서 지속되는 변형된 관계로 나타난다. 김보라의 정가와 윤보람의 첼로가 슬픔을 침화시킨다. 감동적인 효심의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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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확대보기평인 이승주는 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 일무·승무 이수자, 태평무 전수자로서 아악일무보존회·정재연구회·서한우버꾸춤보존회 상임이사, 김진걸산조춤보존회 부회장으로 활약하는 한국무용가이다. 그녀는 제26회 한밭국악전국대회 대통령상, 제18회 경기국악제 대상 등 다수의 수상 경력과 충주청소년무용단 예술감독으로서 포천시립민속예술단 예술감독, JTBC 드라마 사극 무용감독, 스페인 사라고사 엑스포 공연단장 등을 역임했다.
평인 이승주는 안무작 '나 돌아가리라', '내 안의 바다', '금강산 가는 길목에서', '여인의 향기', 무용극 '오성과 한음', 뮤지컬 '시집가는날', '2011밀양아리랑축제 전야제-달빛 아래 꽃비 내리고', '숨결', '화적연가', '금수정가', '채석공의 노래', '신뺑파전', '장인열전', 'HIKARI_통일의 빛, 함께 이루다', '청학백로주', '태조교서전', '달, 천강에 흐르는 중원의 빛', '수연'(壽宴), '야조', '청연'(淸緣), JTBC 드라마 '비밀 기방 양심정', '인수대비', '꽃들의 전쟁', '하녀들', '마녀보감', '역적', '왕은 사랑한다'로 자신의 창작적 재능을 과시하였다.
평인(平仁) 이승주의 이번 작품은 전통과 현대 사이의 균형, 우리춤의 전통 호흡과 장단감을 유지하면서 섬세한 호흡으로 리듬감을 살리며 내면에 응축된 기운을 표현하였다. 절제된 멋과 단아한 동작으로 전통춤의 깊이와 품격을 보여 주며 개성 있는 춤 빛깔을 덧입혀, 세련된 미감을 보여 주었다. 이승주의 춤은 강렬하다기보다는 절제와 호흡 바탕의 섬세한 미학이 매력이다. 호흡과 멈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조성되면서 친숙하고 신선하게 다가온다. 인간적인 따스함, 몸짓에서 나오는 진솔한 매력의 이승주의 춤은 여러 요소가 어우러져 담백하면서도 깊은 울림을 주었다.
장석용 문화전문위원(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회장), 사진 옥상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