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21년 중국공산당은 상하이에서 고고의 성을 울렸다. 당 창건 100주년인 올해 시진핑 국가주석은 일강 체제를 공고히 하면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미국에 한발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미국과 유럽 제국의 중국 포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중국의 꿈’을 실현하려는 자세를 바꾸려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최근 조 바이든 미 행정부가 보여준 엄중한 대응, 신장에서 위구르인 인권문제에 기인하는 유럽국가들의 움직임 등으로 미루어 볼 때 ‘중국의 꿈’을 둘러싼 대내외 환경에는 예상 밖의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과연 ‘중국의 꿈’은 시진핑 정권이 마음에 그리는 대로 실현될 것인가. 이를 공산당 정권의 과거로부터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래서 시계의 바늘을 반세기 전인 1971년으로 되돌려 본다. 문화대혁명 중이었던 이해에 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해 ‘중국공산당 50주년 1921-1971’(인민출판사 1971년)이 출판됐다. 거기에 결집된 문화혁명 시대의 이론이 당시 중국의 꿈을 뜨겁게 말해 주고 있다.
이에 따르면 “우리 당의 명칭과 우리가 내세우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은 우리 당의 기본강령이며 자본주의와 일체의 착취계급을 철저히 분쇄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리키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의해 부르주아 독재에, 사회주의에 근거해 자본주의에 승리한다.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야말로 당의 최종 목적이다”라고 소리 높여 선언했다.
자본주의를 묻어버린 마오쩌둥(毛澤東)의 혁명은 전국 노동‧인민들이 환호로 맞이했지만, 차례차례 악랄한 반당 책동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최대 난적이자 일관되게 사회주의 개조에 반대해 온 류사오치(劉少奇)가 그 정체를 드러내며 공산당과의 최종 결전의 불씨를 댕겼다. 바로 이것이 문화대혁명의 결정적 동인이 됐다.
마오는 일련의 ‘빛나는 저작’을 통해 류샤오치 일파가 진행하는 사욕·사심을 자극한 경제발전책의 잘못을 철저히 비판했다. 그리고 류샤오치 일파의 책동을 깨뜨림으로써 공업과 농업의 생산은 발전을 거듭했고, 당의 과도기 노선이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류샤오치 일파의 책동은 멈추지 않았다. 이에 대해 당은 “마오 주석을 등지고 (중략) 당을 자본주의의 길로 끌어들이려는 망동을 멈추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고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면서 “이제 제국주의는 전면 붕괴에 직면하고 사회주의는 전 세계에서 승리를 향한 빛나는 시대가 되었다. 공산당이 태어난 반세기 옛날을 회상한다면 전 세계 혁명에 대한 정세는 공전의 훌륭함”이라며 당시 세계정세를 총괄했다. 이리하여 ‘기념 중국공산당 50주년 1921-1971’은 끝을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 만세, 만세, 만세’로 결론지었다.
당시 중국을 둘러싼 대내외 정세를 돌이켜보면 문화대혁명을 발동한 마오쩌둥은 최대 정적 류사오치를 제거하고 국내에서는 절대적 권위를 확립했다. 반면 대외적으로는 정면으로 리처드 닉슨 대통령에게 이끌린 아메리카 제국주의, 배후에 브레즈네프 서기장을 거느린 소련 사회제국주의 등 동서 양 진영의 초강대국을 적으로 돌리고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을 통솔하는 ‘제3 세계’의 맹주를 자칭하고 있었다. 즉 당시의 ‘중국의 꿈’은 모택동 사상에 의해서 세계를 이끌어 공산주의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생경하고 충동적인 말의 향연에 머쓱해지는 생각이 들지만, 과연 마오는 ‘중국의 꿈’의 실현을 향해 어떻게 중국을 이끌고 있었을까?
1957년 11월 소련의 10월 혁명 40주년 기념식 참석차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을 맞아 소련 공산당을 이끄는 흐루시초프는 소련은 15년 만에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와의 사이에서 ‘평화 공존’의 길을 요구하는 흐루시초프를 사회주의 진영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한 마오는 “그렇다면 우리는 15년 이내에 철강 등 주요 공업 생산액에서 영국을 추월하고 미국을 따라잡겠다”라고 응수했다.
확실히 1950년대 말기의 마오에게 있어서의 ‘중국의 꿈’은 영국과 미국을 넘어서는 것이며, 이를 실현한 실적을 배경으로 사회주의 진영의 정점에 서는 것이었을 것이다. 소련에서 돌아온 마오는 당장 중국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야심에 찬 초강수를 둔다. 1958년 8월 하순 중앙정치국 확대 회의(베이다이허 회의)를 소집해 철강 증산 운동 및 인민공사 건설을 골자로 한 대약진 정책을 결정한 것이다.
마오쩌둥 판의 공산당사 격인 중국공산당 역사 간편(상하이 인민출판사‧1958년)은 노간부 교육용에 관련된 역사 변동의 전체 구조를 서술하고, 각 시기 역사적 여건의 전면적 분석과 당의 노선 정책연구에 중점을 두고 편집된 것이지만 마오쩌둥 찬사로 넘쳐난다.
그 내용에 따르면 “마오쩌둥 동지는 우리나라의 영웅적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걸출한 대표이자 우리나라 위대한 민족의 우수한 전통을 갖춘 대표이며, 천재적인 창조적 마르크스주의자이자 인류 최고의 사상인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 실천을 결합시켜 우리 민족 사상을 지금까지 도달한 적이 없었던 높은 곳에까지 끌어 올렸다”는 찬사 일색이다. 그러면서 “마오 동지와 그 사상이 이끄는 바를 따르면 혁명은 승리하고, 이를 거역할 때 혁명은 실패하고 후퇴한다”고 결론을 맺고 있다.
이렇게 해서 마오쩌둥(毛澤東)의 지휘 아래 “정확한 정치와 군사 노선을 걷고, 제국주의를 중국에서 몰아내고, 당내 우경 기회주의를 시의적절하게 바로잡아 국내 반동세력을 무찌르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했다”는 결론 즉, 마오쩌둥에 의한 정통 공산당 역사관이 도출된다.
그는 중국혁명의 승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새로운 승리이며, 이 혁명은 식민지-반식민지 국가에서의 혁명 전형이다. 이 혁명의 승리는 한발 더 나아가 제국주의를 약화하는 자본주의 진영의 모순을 첨예화시키고 세계 양대 진영의 대립 경쟁에서 사회주의 진영에 유리한 변화를 가져온다. 이 혁명의 승리는 모든 압박받는 민족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한없이 고무하고 밀어붙인다. 그러므로 이 승리는 세계적 의의를 갖춘 승리다“라며 마오에게 이끌린 중국혁명의 승리를 최대한으로 격찬했다.
하지만 과연 당시의 중국은 이와 같은 미사여구를 거듭해 마오를 과잉 찬미하는 것으로 ‘중국의 꿈’이 실현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까? 실은, 일련의 마오 찬사는 당시의 공산당 2인자 류샤오치에 의해 나온 것이지만, 류샤오치는 대약진이 결과적으로 초래하게 되는 화를 ”천재가 아니고 인재다“라고 잘라 버리고 결국 마오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만다. 그리거 몇 년 후 류사오치는 문화대혁명의 표적으로 여겨져 중국의 흐루시초프 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실권파’로 단죄된 끝에 말살되고 만 것이다.
‘중국의 꿈’에 대한 적은 여전히 국내외에 둥지를 틀고 있다. 공산당 창당 50주년을 2년 앞둔 1969년 의도했던 대로 정적 류사오치를 숙청한 마오가 승리의 대회라고 치켜세운 제9차 공산당 전국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결의된 정치보고, 당 장정, 신문공보 등 중요 문헌을 읽으면 당시 ‘중국의 꿈’에 대한 적이 떠오른다. 이를테면 ‘사회주의 대 가정론’을 추종하는 입당 관료라는 생각이다.
당시 사회주의 대가의 정론에 대해서 ”소련 수정주의 반도집단은 사회주의 깃발을 흔들며 제국주의 행태를 하고 있다. 아메리카 제국주의와 결탁해 스스로 세계 패권을 향해 책동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몽골인민공화국을 식민지로 바꾸어 버렸고, 유럽에서는 동유럽의 많은 사회주의 국가를 속국으로 편입시켰다. 소련 수정주의가 고취하는 ‘사회주의 대 가정론’이란 이런 종류의 제국주의 침략과 약탈 정책을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이론에 지나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 가정’의 구성원은 영원히 소련 수정주의의 식민지나 속국으로 계속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입당 관료론’ 인데 이를 류샤오치가 퍼뜨린 허망한 이론이라고 강력히 고발했다. 그러면서 ”대부분의 공산당원은 살아서는 혁명을 위해 싸우고, 죽어서는 혁명을 위해 헌신한다. 전신과 전령으로 인민에 복무하며, 공산주의를 위해서 인생을 다 불태운다. 당원은 단 한 명도 빼지 않고 마오 주석의 훌륭한 전사다. 그러나 류샤오치는 입당 관료들을 앞세워 입당해 간부로 출세하라고 설파했다. 이는 정치·조직적으로 공산 당원의 혼을 썩어 문드러지게 하고 자본주의에 굴복할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결국, 마오의 ‘중국의 꿈’ 실현을 가로막는 것은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 대 가정론’이고 국내적으로는 ‘입당 관료’라는 입신 출세주의자였다.
1990년대 초 베를린 장벽 붕괴와 함께 국가를 묶은 사회주의 진영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기에 ‘사회주의 대 가정론’은 이미 역사적으로는 사어가 됐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형태를 바꾸어 ‘일대일로’로서 소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반면 중국 국내로 눈을 돌리면 간부의 부패 비리가 끊이지 않는 현실에서 ‘입당 관료론’도 전혀 극복되지 않은 채 살아남아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아무래도 ‘중국의 꿈’에 적은 여전히 안팎에 둥지를 틀고 있는 것 같다.
당 창건 50주년에서 100주년에 이르기까지 이전 반세기 중국의 변화를 되돌아보면서 마오가 내건 ‘중국의 꿈’을 생각하면, 그것이 무너져 버린 큰 요인으로 1972년의 닉슨 방중이 계기가 된 미‧중 접근이라고 생각된다. 닉슨 방중에 의해 마오 정치를 지지한 ‘죽의 장막’의 실상이 내외에 분명히 드러나게 됐기 때문이다. ‘자력갱생’은 기술적 낙후를 조장했고 ‘위 인민복무’의 길은 가난의 초강대국일 뿐이며 거대한 북한과 다름없었다. 마오가 목표로 한 ‘중국의 꿈’은 결과적으로 ‘백일몽’으로 끝나 버렸다.
마오를 대신해 등장한 덩샤오핑(鄧小平)은 마오의 정치에 지친 국민을 향해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중국의 꿈’을 제시했다. 대외개방 초기에 나온 ‘선부론’(부자가 될수 있는 사람을 먼자 부자가 되게 하라)에 따라 희든 검든 쥐 잡는 좋은 고양이를 지향했다.
덩샤오핑 노선을 이어받은 장쩌민이 가리킨 ‘중국의 꿈’은 ‘주출거(走出去)’로 즉 해외로 치고 나가는 것이었다. 이어 등장한 후진타오(胡錦濤)는 ‘화해사회 실현’ 건설에 ‘중국의 꿈’을 걸었다. 지금 시진핑(習近平) 정권이 내거는 ‘중국의 꿈’은 마오 판의 신버전과 같이 생각된다. 결국, 실현되지 못한 마오 판의 결말을 되돌아보면 ‘중국의 꿈’을 재고할 시기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이다. 당 창건 50주년에 올린 ‘위대한 영수 마오 주석 만세, 만세, 만세’를 되풀이하려는 시진핑은 이를 당 창건 100주년에 즈음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김경수 글로벌이코노믹 편집위원 ggs077@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