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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엑손모빌, 러시아 사할린 유전 복귀 위해 비밀 협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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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엑손모빌, 러시아 사할린 유전 복귀 위해 비밀 협상

2022년 '자산 몰수' 방식의 험악한 결별…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변수로 급부상
러시아는 '기술·자본', 엑손은 '손실 회복' 이해 맞아…정치 리스크는 '뇌관'
2012년 당시 엑슨모빌 CEO였던 렉스 틸러슨(왼쪽)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동하고 있다. 당시 엑슨모빌은 러시아와의 협력이 긴밀했으며, 양측은 사할린 석유·가스 개발 등 다양한 에너지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고 있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2012년 당시 엑슨모빌 CEO였던 렉스 틸러슨(왼쪽)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회동하고 있다. 당시 엑슨모빌은 러시아와의 협력이 긴밀했으며, 양측은 사할린 석유·가스 개발 등 다양한 에너지 프로젝트를 함께 추진하고 있었다. 사진=로이터
미국 석유 공룡 엑손모빌이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단행했던 러시아 철수 결정을 3년 만에 뒤집기 위한 비밀 협상을 진행해온 것으로 파악됐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6일(현지시각) 엑손모빌이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을 전제로 러시아 국영 에너지 기업 로즈네프트와 사업 복귀를 논의해왔다고 보도했다. 이번 논의는 트럼프-푸틴 정상회담과 맞물려 진행된 것으로, 성사될 경우 서방과 러시아 사이 단절됐던 경제 협력을 복원하는 최대 규모의 상징적 사건이 될 전망이다.

최근 알래스카에서 열린 정상회담 뒤 푸틴 대통령은 미국과 러시아가 더 많은 사업을 할 수 있다고 밝혔고, 트럼프 대통령은 "거래를 기대한다"고 화답했다. 두 정상이 공개하지 않은 막후에서는 이미 양국 최대 에너지 기업이 러시아 극동 연안의 석유·가스 사업 재개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그려놓았다.

복수의 관계자에 따르면 엑손모빌은 올해 로즈네프트와의 비밀 협상에서 양국 정부가 우크라이나 평화 프로세스의 하나로 승인한다면, 과거 핵심 사업이었던 사할린-1 프로젝트에 복귀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사안의 민감성 탓에 엑손모빌 내부에서도 극소수만 이 사실을 알았으며, 협상은 닐 채프먼 수석 부사장이 직접 이끌었다고 한다. 바이든과 트럼프 행정부에서도 엑손모빌은 러시아 내 좌초자산 관련 협상을 위해 미 재무부의 허가를 받아왔다.
엑손모빌의 대런 우즈 최고경영자(CEO) 역시 최근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만나 러시아 사업 복귀 가능성을 논의하며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고, 미국 정부가 엑손의 복귀에 "우호적인 신호"를 보내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 '40억 달러 손실' 험악한 결별…돌연 화해 손짓

엑손모빌의 사업 재개가 극적인 화해로 평가받는 이유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 뒤 이어진 결별 과정이 극히 험악했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 뒤 서방 기업 가운데 가장 깊숙이 러시아에 진출했던 엑손모빌은 침공 뒤 가장 신랄한 철수 과정을 겪었다.

1995년 처음 합의한 사할린-1 프로젝트는 엑손모빌의 최대 해외 투자 가운데 하나였다. 2005년부터 원유 생산이 시작됐으며, 엑손모빌은 지분 30%를 보유하고 사업을 직접 운영했다. 당시 엑손모빌의 렉스 틸러슨 CEO가 푸틴 대통령에게 '우정 훈장'을 받을 만큼 양측 관계는 돈독했으며, 2014년 러시아의 크름반도 병합 뒤 일부 사업이 제재를 받았을 때도 사할린 프로젝트는 무사했다.

그러나 2022년 침공 뒤 서방 기업들이 러시아를 떠나자 엑손모빌은 40억 달러(약 5조 5800억 원)가 넘는 자산을 상각 처리하고 지분 매각을 선언했다. 러시아 정부는 매각을 막은 뒤 지분을 강제 무효화했고, 엑손모빌은 이를 '자산 몰수'로 규정하며 양측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 푸틴, 법령 개정하며 '러브콜'…엑손은 손실 회복 노려

엑손모빌의 복귀는 첨단 기술과 해외 자본이 절실한 크렘린궁에 큰 성과가 될 수 있다. 러시아 석유 산업은 제재 속에서도 생산량을 유지했지만, 서방의 기술과 자본 없이는 앞으로 생산 능력이 약해지는 것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엑손모빌과 로즈네프트의 논의는 올 1월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을 전후해 본격화했다.

지난 2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양국 고위 관료들이 종전 협상을 위한 공개 회동을 했고, 이와 따로 엑손모빌의 채프먼 부사장은 카타르 도하에서 미국의 제재 대상인 로즈네프트의 이고르 세친 CEO와 직접 만났다.

엑손모빌의 복귀를 위한 길은 차근차근 닦이는 모양새다. 푸틴 대통령은 미-러 정상회담 당일, 외국 기업이 사할린 프로젝트 운영 법인의 지분을 다시 소유하도록 허용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해외 장비 공급과 제재 해제를 위한 로비를 조건으로 달았지만, 사실상 엑손모빌을 향한 '러브콜'인 셈이다.

엑손모빌의 재진입 여부는 러시아가 제시할 조건에 달렸다. 회사는 최소한 철수 과정에서 발생한 막대한 손실을 회복하길 원한다고 한다. 협상에서는 1990년대 체결했던 생산물 분배 계약 모델을 되살리는 방안도 거론된다.

전쟁 발발 뒤에도 양사는 비공식 소통 채널을 계속 유지해왔다. 전쟁이 끝나면 러시아의 풍부한 에너지 자원은 서방 기업에 여전히 매력 있는 시장이다. 철수 직전 사할린 프로젝트는 엑손모빌 전체 석유 생산의 약 3%를 차지하는 작지만 확실한 수익원이었다.

다만 엑손모빌이 복귀하더라도 과거와는 전혀 다른 사업 환경에 맞서야 한다. 러시아 경제는 제재와 인플레이션으로 둔화했고, 국가에 따른 자산 압류가 일상화했다. 원유 시장 역시 유럽 대신 인도와 중국 중심으로 재편됐다. 올봄까지만 해도 푸틴 대통령에게 냉담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알래스카 회담에서 다시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엑손모빌의 러시아 복귀 이야기는 다시금 현실성을 얻고 있다.

이번 비밀 협상은 단순한 기업 사이 이해관계를 넘어, 미국과 러시아의 관계 회복과 국제 에너지 패권 재편이 걸린 중대 사안이다. 엑손의 복귀는 다른 서방 기업들에 러시아 시장 재진입의 신호탄이 될 수 있으며, 서방 자본 유입은 중국에 대한 러시아의 의존도를 낮춰 중·러 밀착 구도를 약화시킬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엑손에는 막대한 손실을 회복할 기회지만, 예측 불가능한 러시아의 정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위태로운 베팅이기도 하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