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 제조업 부활' 기치…로봇·항공우주 기업 유치해 4만개 일자리 창출
조용한 농촌 뒤흔든 '비밀주의 개발'…주민투표가 최대 관문
조용한 농촌 뒤흔든 '비밀주의 개발'…주민투표가 최대 관문

'제조업 부활' 내건 40만명 자족도시 구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동쪽으로 한 시간 반 거리에 있는 솔라노 카운티. 소와 풍력발전기만이 드넓은 목초지를 채우던 이 한적한 농촌 지역은 지난해 여름, IT 업계를 뒤흔든 뉴스의 중심으로 섰다. ‘캘리포니아 포에버’라는 회사가 2018년부터 5년간 정체를 숨긴 채 일대 토지를 대거 매입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들이 600여 명의 지주에게서 사들인 땅은 총 10억 달러(약 1조3889억 원) 규모로, 면적은 일본 도쿄도 세타가야구의 4.5배에 이른다.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은 프로젝트의 배후다. 구글과 애플의 초기 투자자 존 도어(John Doerr)와 마이클 모리츠(Michael Moritz), 링크드인 공동창업자 리드 호프먼(Reid Hoffman), 유명 벤처캐피털리스트 마크 앤드리슨(Marc Andreessen), 그리고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부인 로렌 파월 잡스(Laurene Powell Jobs)까지,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억만장자들이 출자자 명단에 대거 이름을 올렸다.
이들이 나선 배경에는 실리콘밸리가 마주한 성장의 한계가 있다. 토지 부족과 부동산 가격 폭등, 복잡한 규제로 주택이나 공장 하나를 짓는 데도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농촌 지역에 '제로베이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프로젝트의 최종 목표는 저렴한 주택과 직주근접 환경을 제공해 첨단 제조업 기업을 유치하고, 약 40만 명이 거주하는 자족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솔라노 카운티의 현재 전체 인구와 맞먹는 규모다.
계획의 심장부는 '솔라노 파운드리(Solano Foundry)'로 이름 붙인 산업단지다. 캘리포니아 포에버는 지난 7월, 신도시 중심부에 로보틱스, 항공·방위, 물류, 에너지 관련 기업을 집적시킬 단지 조성 계획을 발표했다. 이곳에서는 건설 인허가 기간을 90일 이내로 단축하고, 전력과 교통 등 핵심 기반 시설을 완비해 4만 개의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고 약속했다.
캘리포니아 포에버의 안드레아스 리버 산업단지 책임자는 "소프트웨어 중심의 기술 혁신이 하드웨어로 확산하는 지금이 미국 최대의 첨단 제조업 클러스터를 만들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운영사는 유망 기업의 입주를 유도하고 일부 기업에는 직접 투자도 병행할 방침이다. 2028년 착공해 2030년부터 입주를 시작한다는 구체적인 시간표도 제시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미국의 제조업 부흥을 추진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기조와 맞물려 더욱 관심을 끈다. 캘리포니아 포에버는 지난 3월, 신도시 남쪽 강변에 조선소를 짓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정책적 순풍을 활용하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리버 책임자는 "솔라노 카운티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금으로 숙련된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생산과 연구개발 거점을 인접시켜 개발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입주 검토 기업들의 기대가 크다"고 밝혔다. 그는 앞으로 '플라잉카'를 도입해 샌프란시스코와의 이동 시간을 20분으로 단축하겠다는 청사진도 제시했다.
비밀주의·강압적 방식에 지역사회 '불신'
하지만 원대한 계획과 달리 현실의 장벽은 높다. 가장 큰 걸림돌은 지역 주민들의 반감이다. 신도시 예정지 인근 리오 비스타시의 부동산 중개업자 스테이샤 올슨은 "대부분이 조용한 노후를 보내기 위해 이곳에 정착했는데, 바로 옆에 샌프란시스코 같은 대도시가 들어선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며 지역의 정서를 대변했다.
특히 캘리포니아 포에버가 수년간 비밀리에 토지를 매입하고, 매각을 거부한 일부 지주를 상대로 소송까지 제기한 사실이 드러나자 '비밀주의'와 '강압적 개발'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리오 비스타의 세라 도넬리 부시장은 "그들이 지역의 규칙을 무시하고 자신들의 구상만 밀어붙일까 우려스럽다"며 "억만장자들이 막강한 영향력을 이용해 계획을 강행할 것을 경계한다"고 말했다.
물론 기대 섞인 목소리도 있다. 일자리가 부족해 젊은 층이 계속 떠나면서 지역 소멸을 걱정하던 주민들에게 신도시 건설은 새로운 활력이 될 수 있다. 계획을 지지하는 주민 데모스 펀살란(73)은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 젊은이들이 돌아온다면, 의료 시설 확충 등 기존 주민들에게도 혜택이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속도전과 하향식 의사 결정으로 대표되는 '실리콘밸리 방식'이 시험대에 올랐다. 이 계획을 추진하려면 주민 투표에서 과반수 표를 얻어 솔라노 카운티의 대규모 개발 규제를 바꾸거나, 농지 용도 변경을 승인받아야 하는 만큼 지역 사회와의 진정성 있는 소통이 관건으로 떠올랐다. 기술 거인들의 원대한 꿈이 현실이 될지, 아니면 지역 사회의 반발에 부딪힌 또 하나의 실패한 유토피아로 남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