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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미국 조선업 부활 전략, '이민 단속' 암초에 좌초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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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미국 조선업 부활 전략, '이민 단속' 암초에 좌초 위기

쇄빙선은 핀란드에, 대규모 투자는 한국에 의존…절실해진 해외 협력
현대차 공장 기술자 추방 파문…'이중잣대'에 투자 동맹 신뢰 흔들
미국이 '해상 지배력 복원'을 목표로 조선업 부활을 추진하고 있으나, 외국 기술과 투자에 의존하면서도 동맹국 기술자를 추방하는 모순된 정책으로 전략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베어드 마리타임이미지 확대보기
미국이 '해상 지배력 복원'을 목표로 조선업 부활을 추진하고 있으나, 외국 기술과 투자에 의존하면서도 동맹국 기술자를 추방하는 모순된 정책으로 전략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사진=베어드 마리타임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야심 차게 내건 '조선 르네상스'가 자가당착적인 이민 정책이라는 암초에 부딪혔다. 쇄빙선 건조는 핀란드에, 대규모 투자는 한국에 의존하는 등 해외 동맹국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에서, 정작 현장에 투입된 한국인 기술자들을 대대적으로 단속·추방하는 모순된 정책이 부활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조선 해양 전문 매체 베어드 마리타임은 15일(현지시각) 이 같은 미국의 이중적 행보가 '해상 지배력 복원'이라는 국정 목표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해상 지배력 복원' 선언했지만…현실은 해외 의존


트럼프 행정부의 조선업 부흥 의지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9일 서명한 '미국의 해상 지배력 복원' 행정명령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이 명령은 "미국의 상업용 조선 능력과 해양 인력은 수십 년간 정부 방치로 약화했으며, 이는 한때 강력했던 산업 기반의 쇠퇴로 이어지는 동시에 우리의 적대국에 힘을 실어주고 미국의 국가 안보를 잠식했다"고 진단했다. 특히 "미국은 전 세계 상업용 선박의 1% 미만을 건조하는 반면, 중국은 약 절반을 생산하고 있다"는 현실을 지적하며 위기감을 드러냈다. 이에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주도로 국무부, 국방부 등 관계 부처를 총망라해 210일 안에 조선 역량 강화, 기술 혁신, 인력 양성을 포함한 종합 '해양 실행 계획'을 수립하라고 구체적으로 지시했다.

하지만 이런 야심 찬 계획은 시작부터 회의론에 부딪혔다. 미국 내 높은 인건비와 약화한 산업 기반 탓에 단기간에 조선업을 되살리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하나의 크고 아름다운 법안(One Big Beautiful Bill Act)'을 통해 미국 해안경비대의 극지방 안보 쇄빙선(PSC) 건조 예산으로 43억 달러(약 5조9600억 원)를 책정했지만, 루이지애나의 볼린저 조선소에서 건조 중인 첫 선박 인도는 2030년에나 가능할 전망이어서 사업이 지연되고 있다. 그 외 21건에 이르는 추가 쇄빙선 건조 계획 역시 정보요청서(RFI) 단계에 머물러 있을 뿐, 공식 발주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미국 내 건조를 고집하는 대신 해외에서 선박을 도입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특히 북극 해양경로 확보라는 전략적 목표를 위해 쇄빙선 강국인 핀란드에 눈을 돌린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6월 NATO 정상회의에서 직접 핀란드산 쇄빙선 구매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는 알렉산데르 스투브 핀란드 대통령에게 제안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미국에는 쇄빙선이 필요하고, 저렴하게 구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당신들은 쇄빙선의 왕"이라고 말했다. 이는 세계 최고 수준의 쇄빙선 건조 기술을 보유한 핀란드 조선소들과 실제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보도에 힘을 실었다.

앞서 2024년 12월, 미 해안경비대는 자국 기업 에디슨 슈스트로부터 유일한 미국산 민간 쇄빙선 '아이빅'을 1억2500만 달러(약 1732억 원)에 사들인 바 있는데, 이 과정에서 에디슨 슈스트가 해당 선박 구매를 주장한 일부 의원들에게 정치자금을 기부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대규모 투자 유치해놓고…동맹국 기술자에 '수갑'


미국 조선업이 마주한 가장 큰 문제는 수십 년간의 침체 탓에 숙련된 기술 인력과 첨단 건조 기술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다. 행정명령은 미국해양기술대(USMMA) 지원 확대 등 자체 인력 양성 계획을 담고 있지만, 당장의 공백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이를 해결하고자 미 노동부는 캐나다, 핀란드, 일본, 한국 등 동맹국에 자국 견습생을 파견하는 4년간 800만 달러(약 110억 원) 규모의 '국제 펠로우십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하지만 해당 프로그램은 해마다 200만 달러(약 27억 원), 약 40명의 인력을 해외에 연수시키는 수준에 그친다. 각각 수만 명의 인력이 일하는 한국의 한화오션이나 삼성중공업의 규모와 비교하면 '대양 속 물 한 방울'에 불과해 실효성을 의심받는다.

미국 조선업 부활을 위한 현실적인 대안은 행정명령에서도 강조했듯이 한국, 일본 등 동맹국의 직접 투자와 기술 이전에 기댈 수밖에 없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의 높은 관세 정책에 맞서 한국 기업들은 대미 투자를 서둘렀고, 지난 8월 대한민국의 이재명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을 계기로 총 1500억 달러(약 207조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약속했다.

조선업 분야에서는 삼성중공업이 오리건주의 비거 마린 그룹과 미 해군 지원함 정비사업 협력을 맺었고, 한화는 지난해 1억 달러(약 1386억 원)에 인수한 펜실베이니아 필리 조선소에 50억 달러(약 6조 9310억 원)를 추가 투자해 신규 도크와 안벽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한화해운은 이 조선소에 20년 만의 최대 규모인 석유화학제품선 10척을 발주하는 등 구체적인 성과도 나타났다.

그러나 이런 우호적인 분위기는 이달 조지아주에서 벌어진 대규모 이민 단속으로 하루아침에 얼어붙었다. 미 국토안보부 산하 이민세관단속국(ICE)은 건설 중인 43억 달러(약 5조9606억 원) 규모의 현대-LG 배터리 공장을 급습해 300명이 넘는 한국인 기술자들을 체포했다. 이들 중 다수는 공장 설비 시운전과 현지 인력 교육을 위해 합법적인 상용 비자(B-1)로 머물고 있었음에도, 복면을 쓴 요원들에게 수갑이 채워지고 공개적으로 연행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들에게는 5년간 재입국 금지와 함께 즉시 추방을 받아들이거나, 열악한 환경의 구치소에서 수개월간 재판을 받으라는 선택지가 주어졌다.

이 사건은 한국 사회에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다. 한국무역협회의 장상식 연구본부장은 파이낸셜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는 이중적"이라며 "더 많은 투자를 요청하면서도, 사업에 필수적인 한국 근로자들을 범죄자처럼 취급하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한국 대통령 역시 "이번 사태가 대미 직접 투자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외국인 투자와 기술 없이는 첨단 배터리 공장도, LNG 운반선도 지을 수 없는 미국의 현실을 외면한 채, 투자 동반자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는 모순적인 정책이 투자 심리를 급격히 위축시켰다.

미국의 이런 불안정한 정책은 다른 동맹국들의 신뢰마저 흔들고 있다. 노르웨이는 차기 호위함 도입 사업에서 미국산 대신 영국 BAE 시스템스가 건조하는 26형 호위함을 선택했고, 스페인, 캐나다, 독일 등도 F-35 전투기 구매 계획을 다시 생각하고 있다. 미국이 진정으로 조선업 부활을 원한다면, 외국인 투자자와 기술 전문가를 존중하고 규제개혁을 함께 추진하는 총체적이고 일관된 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