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비용 앞세운 美 패시브 펀드 공세…유럽, '규모의 경제'로 맞불
통합만이 살길이지만…문화 충돌·정치 변수에 '성공 불투명'
통합만이 살길이지만…문화 충돌·정치 변수에 '성공 불투명'

블룸버그통신은 24일(현지시각) 이 같은 흐름이 금융 위기 이후 저비용 펀드를 무기로 유럽 시장을 잠식해 온 미국계 거대 운용사에 맞서기 위한 유럽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거세지는 통합의 물결, 행동으로 증명
수수료 인하 압박과 미국 경쟁사의 파상공세라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유럽 자산운용사들의 선택지는 명확하다. 비용과 인력을 줄이는 통합을 단행하거나, 이마저도 미국이 주도권을 쥔 대체 자산과 사모 시장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올리버 와이먼의 크리스티안 에델만 유럽 대표는 "단순히 논의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실질적인 행동을 목격한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통합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다. 패시브 펀드 시장은 이미 막대한 규모를 갖춘 선발 주자들이 장악했고, 전통 운용사의 기업가치가 하락한 때에 대체 자산 운용사를 인수하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든다. 여기에 각국의 정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M&A의 발목을 잡기도 한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통합이 시대적 흐름인 배경에는 투자 패러다임의 근본 변화가 자리한다. 투자자들이 비싼 운용보수를 내야 하는 액티브 펀드를 떠나 저비용 패시브 상품으로 이동하는 추세가 빨라지고 있다. 보스턴 컨설팅 그룹과 ISS 마켓 인텔리전스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뮤추얼 펀드와 ETF 자산에서 패시브 상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39%에 육박하며 10년 전의 두 배 수준으로 급증했다.
'미국의 그림자'… 잠식당하는 유럽 안방
이러한 시장 변화의 가장 큰 수혜자는 미국 운용사들이다. 이들은 유럽 시장에서 무서운 속도로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ISS 마켓 인텔리전스의 데이터는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2014년 이후 유럽 내 미국 운용사들의 운용자산은 120% 넘게 늘어난 반면, 유럽 운용사들은 84% 성장에 그쳤다.
유럽 시장은 4600여 운용사가 난립할 정도로 심하게 나뉘어 있다. 유럽 펀드자산운용협회(EFAMA)에 따르면 지난해 이 지역의 총 운용자산 규모는 약 34조 유로(40조 달러)에 이르렀지만, 자국에서는 이름이 알려졌어도 유럽 전역을 아우르는 규모와 경쟁력을 갖춘 곳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블룸버그 분석에 따르면, 5억 달러(약 6977억 원) 이상 대형 펀드 시장에서 2% 이상 점유율을 확보한 운용사는 단 7곳이며, 이 중 블랙록, 뱅가드, JP모건이 미국 기업이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유럽에서도 최상위 유럽 운용사인 아문디의 두 배에 이르는 시장 점유율로 시장을 압도하고 있다. JP모건 역시 유럽 액티브 ETF 시장의 절대 강자로 군림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유럽의 대표주자는 적극적인 M&A로 몸집을 키운 아문디와 크레디트 스위스를 인수한 UBS 그룹 정도다. 하지만 독일의 알리안츠나 DWS 그룹처럼 1조 달러(약 1390조 원)를 겨우 넘는 운용사들은 잠재적 피인수 후보로 거론된다. 실제로 알리안츠는 장부상 2조 달러(약 2790조 원) 넘는 자산을 운용하지만, 미국 자회사 핌코의 유럽 시장 점유율은 1.4%에 그치고 유럽 법인인 알리안츠 글로벌 인베스터스(AGI)는 상위 2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등 내부적으로 나뉜 구조의 한계를 안고 있다. 모닝스타의 모니카 칼레이 리서치 디렉터는 "시장이 더욱 경쟁적으로 변하면서 통합이 늘고 있다"며 "기업들은 인수를 통해 사모 시장 같은 새로운 분야로 상품을 확장하고자 한다"고 분석했다.
가시화하는 '빅딜'… M&A로 판 흔드는 유럽
최근 성사된 두 건의 대형 거래는 유럽 자산운용업계 재편의 신호탄으로 평가받는다. BNP 파리바는 악사의 투자 부문을 인수해 1조 8000억 달러(약 2511조 원) 규모의 거대 운용사로 발돋움했다. BNP 파리바는 이번 인수를 통해 보험과 연금 자산 관리의 유럽 선두주자로 자리매김하고, 나아가 사모 자산과 ETF 시장의 최고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프랑스 BPCE 그룹의 나틱시스와 이탈리아 제네랄리 역시 50대 50 합작 법인 형태로 1조 9000억 유로(약 3128조 원) 규모의 합병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했으나, 이탈리아 내 반대로 성사 여부는 불투명하다.
물밑에서는 더 많은 논의가 오간다. 아문디는 알리안츠의 유럽 펀드 부문(AGI) 인수에 관심을 보였고, AGI는 도이체방크의 DWS와 독일 내 합병 가능성도 타진하고 있다. JP모건이 저평가된 영국 최대 독립 운용사 슈로더를 인수할 수 있다는 가상 시나리오까지 나오고 있다. 슈로더를 인수하면 JP모건의 운용자산은 3조 9000억 달러(약 5441조 원)에서 약 1조 달러(약 1395조 원)가 추가된 4조 9000억 달러(약 6836조 원)로 불어난다. 슈로더 가문이 의결권 주식의 44%를 통제하지만, 회사 주가가 지난 10년간 하락세를 면치 못해 M&A 표적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사모펀드(PE) 역시 잠재 인수자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CVC 캐피탈 파트너스가 이끄는 컨소시엄이 영국 최대 개인 투자 플랫폼인 하그리브스 랜스다운을 인수한 사례처럼, PE들이 애버딘 그룹을 포함한 유럽의 여러 자산운용사를 주시하고 있다.
성공 보증수표 아닌 M&A, '통합의 덫' 경계령
하지만 M&A가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자산운용업의 핵심 자산은 '사람'과 '신뢰'이기에, 물리적 결합이 시너지로 이어지지 않기도 한다. 슈로더의 리처드 올드필드 최고경영자(CEO)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와 투자 절차를 가진 두 사업체를 충돌시키듯 합치는 것은 관리하기 매우 어렵다"고 지적했다.
실패 사례도 명확하다. 2017년 합병한 야누스 헨더슨 그룹은 21분기 연속 1000억 달러(약 139조 원) 넘는 자금 유출을 겪었고, 애버딘 자산운용과 스탠더드 라이프의 합병 역시 수년간의 자금 이탈로 고전했다. 여기에 각국 정부의 정치 개입과 유럽중앙은행(ECB)의 엄격한 규제는 M&A의 또 다른 걸림돌이다.
이처럼 치열한 생존 경쟁 속에서 해법은 '규모'로 모아진다.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까다로운 기관 투자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몸집을 불려야만 하는 처지다. 이런 냉혹한 현실에 대해 보스턴 컨설팅 그룹 딘 프랭클 파트너의 진단은 명확하다. "누구도 업계 1~3위 운용사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하지는 않는다. 짧은 실적을 가진 소규모 부티크 운용사에 기회를 주었다가는 해고당할 수도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