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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엔비디아-UAE '수십억 달러' AI칩 계약 5개월째 표류…백악관 내 불협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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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엔비디아-UAE '수십억 달러' AI칩 계약 5개월째 표류…백악관 내 불협화음

러트닉 상무부 장관, UAE에 '선투자' 압박하며 제동…젠슨 황 CEO '좌절'
미국 'AI 수출 전략' 차질 우려, 대중국 기술 패권 경쟁 구상 흔들리나
지난 5월 아부다비에서 (왼쪽부터)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UAE 대통령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UAE 대통령궁이미지 확대보기
지난 5월 아부다비에서 (왼쪽부터)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셰이크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UAE 대통령이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UAE 대통령궁
미국의 첨단 기술과 중동의 자본을 묶어 중국을 견제하려던 트럼프 행정부의 구상이 핵심적인 AI 반도체 수출 계약에서 암초를 만났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일(현지시각) 미국과 아랍에미리트(UAE)가 체결한 수십억 달러 규모의 엔비디아 칩 공급 계약이 미 상무부의 제동으로 5개월째 전면 중단됐다고 보도했다. 이 지정학적 거래의 표류는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노골적인 불만을 야기한 것은 물론, 백악관 내 불협화음까지 드러내며 미국의 대중국 기술 패권 전략 자체를 시험대에 올리고 있다.

지난 5월 트럼프 대통령이 UAE 순방 성과로 발표한 이 계약은 체결 직후부터 답보 상태에 빠졌다. 사안에 정통한 소식통들은 계약의 더딘 진척이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데이비드 색스 백악관 AI 차르 등 행정부 고위 인사들에게 상당한 좌절감을 안기고 있다고 전했다.

황 CEO와 색스 차르는 이번 계약이 신속하게 이행되어 미국의 새로운 기술 수출 전략의 성공 사례로 부각되기를 기대했다. 연간 수십만 개에 이르는 AI 칩을 동맹국에 제공하고 투자를 유치하는 모델을 통해 '중국 대신 미국의 AI 기반 시설을 선택하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전파하고, 이를 통해 중국의 AI 부상을 견제하려는 큰 그림을 그렸다.

계약의 핵심은 UAE가 미국 내 데이터센터 건설과 AI 기반 시설에 투자하는 대가로 엔비디아 AI 칩 공급을 보장받는 구조다. 특히 UAE의 투자액과 엔비디아 칩의 가치를 1대1로 연동해, 최소 10억 달러(약 1조 4000억원) 투자에 상응하는 10억 달러 규모의 칩을 우선 구매하는 계획까지 포함됐다. 하지만 5개월이 다 되도록 UAE의 투자가 구체화하지 않아 일부 행정부 관리들조차 정확한 지연 까닭을 파악하지 못해 당혹스러워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러트닉 상무장관, '선투자·안보' 명분으로 제동


이번 거래 지연의 중심에는 하워드 러트닉 상무부 장관이 있다. 당초 계약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그는 돌연 UAE 측에 약속했던 대미 투자를 먼저 이행하라고 압박하며 칩 인도에 필요한 수출 허가 승인을 미루고 있다. '투자가 먼저 집행되어야 칩을 보낼 수 있다'는 그의 강경한 태도가 거래 전체를 중단시킨 핵심 원인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특히 올여름부터 러트닉 장관과 일부 관리들은 UAE와 중국의 긴밀한 관계에 대한 국가 안보 우려를 제기하기 시작했다. UAE로 수출한 최첨단 AI 칩이 어떤 경로로든 중국 AI 산업으로 유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문제 삼은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아부다비에 본사를 둔 AI 기업 G42가 계약 대상에 포함되면서 더욱 커졌다. 상무부는 G42를 통한 기술 우회 유출 가능성을 막기 위해 이 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칩 수출은 불허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으로 전해졌다.

AI칩 둘러싼 백악관-엔비디아의 '불편한 동거'


이번 사태는 최근 관세 정책과 전문직 비자(H-1B) 수수료 인상 등으로 비판받아온 러트닉 장관 개인에게도 중요한 시험대가 되고 있다. 황 CEO는 공개적으로 러트닉 장관을 "행정부에서 가장 자주 연락하는 인물"이라며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지만, 내부적으로는 다른 행정부 관리들에게 진행 지연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압박을 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8월 엔비디아의 중국향 H20 칩 수출을 허용하는 과정에서 매출의 15%를 정부에 귀속시킬 것을 요구해 ‘사실상의 불법 수출세’라는 논란을 빚는 등, 엔비디아는 미국의 전략 이익과 상업적 이해관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쿠시 데사이 백악관 대변인은 "색스 차르와 러트닉 장관은 대통령의 AI 의제에 필수적인 인물"이라며 갈등설을 부인했지만, 행정부 내에서는 러트닉 장관이 실제로 절차를 지연시킨다는 비판적인 시각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이번 거래는 트럼프 행정부의 국정 운영 철학을 명확히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행정부는 일본으로부터 5500억 달러(약 775조 원)의 대미 투자를 끌어내고, 연방 보조금을 통해 인텔의 지분을 직접 확보하는 등 기술과 산업 정책에 국가가 깊숙이 개입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UAE 역시 이번 AI 투자 외에도 트럼프 일가의 암호화폐 사업, 틱톡 미국 사업부 지분 인수 등에 참여하며 미국 내 정치·경제적 이해관계를 넓혀가고 있다.

단기적으로 UAE가 연내 10억 달러(약 1조 4000억 원) 투자를 집행하면 초도 물량 공급을 재개할 가능성은 남아있다. 하지만 투자가 계속 늦어지거나 중국 연계 논란이 다시 불거지면, 미국의 기술 동맹 전략 자체가 시험대에 오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