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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범용칩 하나에 유럽 車 멈췄다"…ASML CEO, 자국 정부에 '직격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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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범용칩 하나에 유럽 車 멈췄다"…ASML CEO, 자국 정부에 '직격탄'

네덜란드 '안보 칼날', 中 넥스페리아 겨눴다…美 압박 속 '2차대전 법'까지 동원
中 '후공정' 역습에 유럽 車 라인 '스톱'…푸케 "취약한 생태계만 드러내"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반도체 생태계는 본질적으로 취약하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기업 ASML의 크리스토프 푸케 최고경영자(CEO)가 자국 정부와 중국 간의 정면충돌을 빚은 '넥스페리아(Nexperia) 사태'를 두고 내놓은 진단이다. 그는 지난 일요일(16일) 네덜란드 TV 프로그램 '뷔텐호프'에 출연해 "사태가 악화하기 전에 대화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이번에는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고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의 경고를 날렸다.

푸케 CEO의 발언은 단순한 업계 원로의 조언이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칩 제조사 넥스페리아의 경영권을 둘러싼 네덜란드와 중국의 갈등이지만, 그 이면에는 미국의 대(對)중국 압박, 유럽의 '기술 주권' 확보 움직임, 그리고 '레거시 칩(구형 범용 반도체)'마저 무기화될 수 있음을 보여준 중국의 정교한 보복 조치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번 사태는 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가 아닌, 수십 년 된 '범용 칩' 하나가 유럽 전체의 자동차 생산 라인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을 입증했다. 푸케 CEO의 '취약하다'는 경고는, 바로 자국인 네덜란드 정부가 촉발한 이 나비효과가 ASML 자신에게도 언제든 닥칠 수 있다는 '현실적 공포'에 기반한다.

美 압박에…'잠자던 법' 깨운 네덜란드


사태의 발단은 지난 9월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 정부는 중국 윙테크(Wingtech Technology)가 소유한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에 대해 '중대한 지배권'을 행사한다고 돌연 발표했다.

네덜란드 경제부는 "심각한 거버넌스 결함"과 "유럽 반도체 역량에 대한 위협"을 이유로 들며, 1950년대 제정된 '물자 가용성 법(Goods Availability Act)'을 사상 처음으로 발동했다. 사실상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대를 대비해 만들어진, 사실상 사문화됐던 법을 '국가 안보'를 명분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이 조치로 네덜란드 정부는 향후 1년간 넥스페리아의 자산, 지적 재산(IP), 사업 운영 또는 인력 구조 변경 등 모든 핵심 결정을 차단하거나 뒤집을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됐다.

네덜란드 네이메헌에 본사를 둔 넥스페리아는 필립스 반도체 사업부에서 분사한 NXP의 일부가 모태다. 2018년 중국의 스마트폰 제조·부품사인 윙테크에 인수되며 중국계 기업이 됐다. 문제는 윙테크가 2024년 12월, 미국의 '수출 통제 명단(Entity List)'에 오른 기업이라는 점이다.

네덜란드 정부의 이번 조치는 독자적인 판단이라기보다, 동맹국인 미국의 지속적인 압박이 작용한 결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실제 네덜란드 법원 기록에 따르면, 이번 조치 직전 미국 관리들은 "무역 제한을 피하려면 현 중국인 CEO 장쉐정(張學政)을 교체해야 한다"는 경고를 네덜란드 측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네덜란드 법원은 장쉐정 CEO를 해임하는 결정을 내렸고, 정부는 '물자 가용성 법'을 발동해 경영권 통제에 나섰다.

정부의 개입 명분은 '기술 유출 방지'였다. 중국 모기업 윙테크가 넥스페리아의 핵심 기술과 지적 재산을 중국으로 이전하려 한다는 '위협'을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논리다.

中의 역습, '범용칩'이 유럽 車 산업 멈췄다


네덜란드 정부의 '기습적인' 경영권 통제에 중국 정부는 즉각 보복에 나섰다. 그러나 그 방식은 전면적인 무역 전쟁이 아닌, 상대의 가장 아픈 고리를 정확히 겨냥한 '외과수술식' 타격이었다.

중국 상무부는 넥스페리아가 중국 내 공장에서 생산해 재수출하는 '완성품 칩'에 대한 수출 통제 조치를 발동했다.

이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꿰뚫는 치명적인 한 수였다. 넥스페리아의 반도체 웨이퍼는 대부분 영국 맨체스터와 독일 함부르크의 팹(공장)에서 생산된다. 하지만 이렇게 생산된 웨이퍼는 중국 광둥성 둥관 등에 위치한 넥스페리아 후공정(조립 및 테스트) 공장으로 보내져 최종 칩으로 완성된다. 넥스페리아 전체 완제품 용량의 약 70%가 중국 후공정 라인을 거친다.

중국 정부는 바로 이 '재수출' 고리를 잠가버렸다. 유럽이 만든 웨이퍼를 중국이 완성해 유럽에 다시 팔지 못하게 막은 것이다.

그 파급력은 즉각적이고 치명적이었다. 넥스페리아가 생산하는 칩은 EUV 장비로 만드는 3나노(nm) 첨단 칩이 아니다. 수십 년 된 기술로 만드는 다이오드, 트랜지스터, 모스펫(MOSFETs) 등 단순 전력 제어용 '레거시 칩'이다.

하지만 이 칩들은 현대 자동차의 '신경망'과 같다. 어댑티브 LED 헤드라이트, 전기차 배터리 관리 시스템(BMS), 잠김 방지 브레이크(ABS), 실내 온도 조절, 계기판 등 차량의 거의 모든 전력 제어 시스템에 필수적으로 탑재된다.

더 큰 문제는 이 칩들이 'AEC Q100/Q101' 등 극도로 엄격한 차량용 반도체 신뢰성 규격을 통과한 부품이라는 점이다. 폭스바겐(VW), BMW, 닛산 등 주요 자동차 제조사들은 이 칩이 없으면 당장 생산 라인을 멈춰야 했다. 다른 공급 업체를 찾아도 이 신뢰성 규격을 새로 인증받는 데만 수개월이 소요된다.

결국 10월 내내 유럽 자동차 업계는 '칩 보릿고개'에 시달렸고, 일부는 생산 차질을 빚거나 공장 가동을 일시 중단해야 했다. 네덜란드 정부가 '국가 안보'를 위해 시작한 조치가, 자국을 포함한 유럽 연합(EU)의 핵심 기간 산업인 자동차 산업의 '안보'를 위협하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푸케의 '대화'는 누구를 향한 경고인가


이 아수라장 속에서 ASML의 CEO 크리스토프 푸케가 '대화'와 '취약성'을 언급한 것이다. 그의 발언을 표면적으로 해석하면 '양국(네덜란드-중국)이 싸우니 업계가 힘들다'는 원론적 비판처럼 들린다.

푸케의 발언은 중국이 아닌, 바로 자국 정부인 네덜란드 헤이그와, 그 배후에 있는 미국 워싱턴을 향한 '쓴소리'에 가깝다.

푸케 CEO의 머릿속에는 '넥스페리아 다음은 ASML'이라는 등식이 자리 잡고 있다. ASML은 이미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의 요구에 동참해 중국을 향한 EUV 및 구형 DUV(심자외선) 노광장비 수출을 통제하면서 막대한 타격을 입고 있다. 중국은 ASML의 핵심 시장이다.

푸케의 논리는 이렇다. "보라. 고작 '레거시 칩'을 만드는 넥스페리아 하나를 잘못 건드렸다가, 중국이 '후공정 통제'라는 카드로 유럽 자동차 산업 전체를 마비시켰다. 그런데 당신들은 지금 세계에서 유일하게 EUV를 만드는, 반도체 생태계의 심장인 ASML의 수출길을 막고 있다. 만약 중국이 ASML에 대한 보복으로 희토류 공급망이나 다른 핵심 소재로 반격한다면, 넥스페리아 사태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공급망 붕괴'가 올 것이다."

그가 "사태가 악화하기 전에 대화하라"고 한 것은, 네덜란드 정부가 미국의 '국가 안보' 논리에 무조건 동조해 기술 통제 수위를 높이기 전에, 그 파급 효과를 먼저 살피라는 강력한 항의다. 넥스페리아 사태는 ASML에게 '살아있는 교보재'가 된 셈이다.

'봉합', 그러나 끝나지 않은 전쟁


다행히 최악의 사태는 피하는 모양새다. 이달 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미국과 중국 정상이 만나 극적인 '휴전'에 합의하면서 넥스페리아 사태도 급속히 해빙 무드로 돌아섰다.

미국이 윙테크에 적용되던 '계열사 규정(Affiliate Rule)'을 일시 중단하고 일부 관세를 인하하는 유화책을 내놓자, 중국 역시 '민간용'에 한해 넥스페리아 칩의 수출을 일부 재개하기로 했다. 네덜란드 정부도 이번 주 초 중국에 대표단을 급파해 '상호 합의 가능한' 해결책을 모색하고 있다.

푸케 CEO가 "위기의 가장 큰 고비는 지났다"고 말한 배경이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이 얼마나 복잡하고 취약한 지정학적 인질이 되었는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미국과 유럽이 '첨단 칩' 통제에 집중하는 동안, 중국은 '레거시 칩'과 '후공정'이라는 역린을 쥐고 있음을 증명했다.

넥스페리아 사태는 단순한 기업 분쟁이 아닌, '기술 안보'가 '경제 안보'를 어떻게 무너뜨릴 수 있는지 보여준 '탄광 속의 카나리아'다. ASML이 단기적 영향을 피했다는 푸케의 안도 이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더 큰 '지뢰'가 생태계 곳곳에 남아있다는 불안감이 짙게 배어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