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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넥스페리아의 저가 칩은 어떻게 핵심 전략 무기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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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 디코드] 넥스페리아의 저가 칩은 어떻게 핵심 전략 무기가 되었나

넥스페리아, 미·중·유럽 3각 충돌 중심에…'칩' 하나에 세계 車공장 '스톱'
네덜란드 정부의 강제 인수와 美 수출 통제…中, 맞불 통제로 '독자 노선'
팬데믹 교훈 잊은 '공급망 건망증'…車 업계, 저가 모델 중단·가격 인상 '소비자 전가'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이미지 확대보기
사진=오픈AI의 챗GPT-5가 생성한 이미지
단돈 몇 센트에 불과한 저가 반도체가 세계 3대 경제 대국의 지정학 무기로 돌변했다.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반도체 위기가 미중 기술 패권 경쟁과 맞물리며 전 세계 자동차 산업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고 IT전문 매체 디지타임스가 5일(현지시각) 지적했다.

그 폭풍의 눈에 네덜란드의 표준 전력 반도체 공급사 넥스페리아(Nexperia)가 섰다. 넥스페리아는 자동차 전자제어장치(ECU)에 필수적인 트랜지스터 및 다이오드 시장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핵심 공급사다. 이 사태로 폭스바겐, 토요타, 혼다, 닛산 등 주요 완성차 업체의 생산 라인이 마비되는 등 충격파가 확산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 자동차 그룹들은 즉각 경보를 울렸다. 폭스바겐은 독일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대체 공급원 확보에 나섰으며, 일본자동차공업협회(JAMA)는 "심각한 잠재 영향"을 경고했다.

이번 사태는 업계가 팬데믹 시대의 칩 부족 사태로 극심한 홍역을 치렀는데도, 지속적인 공급망 회복력을 구축하는 데 실패했음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한 유럽 분석가는 이를 업계의 "공급망 건망증"이라 칭하며, 결국 스스로 자초한 또 다른 위기에 비틀거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3대 경제 강국, '몇 센트'짜리 칩 쟁탈전


넥스페리아 위기는 단순한 공급 차질을 넘어선다. 이 사태는 2025년 9월 말, 네덜란드 정부가 국가 안보를 이유로 넥스페리아를 강제 인수하며 경영권을 장악하면서 불거졌다. 넥스페리아의 중국 모회사는 윙테크 테크놀로지(Wingtech Technology)다.

미국은 윙테크와 그 자회사 넥스페리아를 겨냥해 수출 통제 목록을 확대하며 서방 중심의 공급망 재편을 노골화했다. 업계 관측통들은 이것이 핵심 공급망 노드를 정밀 타격하려는 워싱턴의 전략이라고 분석한다.

중국은 신속하게 반격했다. 네덜란드의 조치를 맹비난하며 자국 내 넥스페리아 생산 시설에서 제조된 칩의 수출 통제를 단행했다. 넥스페리아 중국 자회사는 한발 더 나아가 네덜란드 본사의 명령을 무시하고 '독립 운영'을 선언, 현지 당국의 지휘만 받겠다고 밝히며 내분 양상마저 보였다.

그 사이에 낀 유럽은 피해자인 동시에 마지못한 중재자라는 모순된 상황에 놓였다. 네덜란드 정부는 자국 산업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넥스페리아의 패키징·테스트 역량 대부분이 중국에 묶이면서 유럽 자동차 공급망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현재 독일 정부가 최대 피해자인 자국 자동차 업계를 위해 워싱턴, 베이징, 헤이그(네덜란드) 사이에서 중재를 시도하고 있다.

'물통 이론'의 함정, 멈춰 선 자동차 공장


이번 위기의 진앙에는 폭스바겐이 있다. 거의 모든 주요 유럽 자동차 제조사가 넥스페리아의 칩에 의존하고 있어 배송 지연이 소매 채널 전반으로 확산하고 있다.

토요타, 혼다, 닛산 등 일본 자동차 제조사들도 긴급 공급 평가에 착수했다. 린(lean) 생산 시스템으로 유명한 일본조차 지정학 충격에는 취약점이 드러난 것이다.

미국의 자동차·장비제조업협회(MEMA)는 "넥스페리아 칩의 사소한 부족이라도 전체 조립 라인을 멈추게 할 수 있다"며 "대안이 존재하지만, 그 격차를 메울 만큼 충분한 물량은 없다"고 경고했다.

공교롭게도 넥스페리아의 칩은 고성능의 첨단 반도체가 아니다. 이는 제동, 에어백 전개, 점화 시스템과 같은 매우 중요한 안전 및 성능 기능을 관리하는 엔진 제어 장치(ECU)에 쓰이는 저비용 부품이다. 그러나 이 저렴한 칩의 부족이 수만 달러에 이르는 차량 생산을 마비시킨 것이다.

독일자동차산업협회(VDA) 회장은 "공급이 조속히 복구되지 않으면 심각한 생산 제한이 뒤따를 수 있다"며 추가 공장 가동 중단 가능성을 경고했다. 이번 위기는 '물통 이론(barrel principle)'처럼, 시스템의 가장 약한 고리가 결국 전체의 용량을 결정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독일의 강력한 금속노조(IG Metall)는 "공급망이 팬데믹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더욱 신랄하게 비판하며, 유럽 정책 입안자들에게 지정학상 민감한 구조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 산업 계획을 채택할 것을 촉구했다.

소비자에게 전가되는 위기 비용


물류 대란을 넘어, 넥스페리아 사태는 소비자에게까지 고통스러운 파급 효과를 미칠 전망이다.

팬데믹 시대의 칩 부족 사태 때와 마찬가지로, 자동차 제조사들은 다시 한번 물량보다 이익을 우선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다. 표준 칩이 부족해지자, 남은 칩을 가장 수익성이 높은 모델에 할당하는 것이다. 예컨대 폭스바겐은 가격이 저렴한 '골프(Golf)'의 생산을 미루거나 삭감하는 대신, 마진이 더 높은 SUV '티구안(Tiguan)'과 '투아렉(Touareg)'의 생산을 보호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결정은 유럽 내 저가 차량 공급을 위축시켜, 이미 고물가에 시달리는 소비자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킬 수 있다. 반면, 넥스페리아 동결 사태의 영향을 받지 않는 중국 자동차 제조사들은 경쟁력 있는 가격의 모델로 해외 시장 진출을 가속할 기회를 맞았다.

공급망 전반의 가격 왜곡도 현실화하고 있다. 자동차 제조사와 공급업체들이 대체품을 구하기 위해 경쟁하면서 칩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높다. 폭스바겐조차 대체 칩이 긴 인증 절차 없이 완벽하게 호환될 수 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빨리 배송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업계 관계자들은 낙관하기 어렵다고 인정한다. 넥스페리아가 오랫동안 시장을 지배해 온 자동차용 트랜지스터 및 다이오드 분야에서 온세미(Onsemi),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STMicroelectronics), 대만의 펀짓 인터내셔널(Panjit International) 등 다른 공급업체들이 단기간에 차량용 등급 표준을 충족하는 생산량을 대규모로 늘리기는 역부족이기 때문이다.

넥스페리아 위기는 지정학 경쟁이 심화되는 시대에 공급망의 취약성이 그 어떤 무역 장벽이나 관세보다 심각한 전략 위험이 되었음을 냉혹하게 상기시킨다. 팬데믹의 교훈에도 업계가 공급망 회복력 높이기에 실패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칩 하나에 전체 자동차 생산이 좌우되는 구조상 취약점을 극복하고,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반도체 공급망 자립을 위한 전략 산업 정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든든한 예비 자원을 구축하고 국내 생산 능력을 확보하는 국가만이, 칩을 무기로 한 새로운 국제 제조업 전쟁에서 생존을 담보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