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뒤" 외친 서방 제치고 "당장 납품"...폴란드·중동 사로잡은 '속도·패키지' 전략 기술 이전 요구 거세지는 '독이 든 성배'...'성장 엔진'과 '안보 뇌관' 사이 국가 전략 시급
이미지 확대보기유럽 참호 뒤에서 불어난 100조 원짜리 주문 장부
우크라이나 전쟁 4년 차. 유럽의 참호와 동부 전선 뒤편에서, 한국의 방위산업은 조용히 세계 지도를 다시 그리고 있다. 지난해 한 해 전체 영업이익을 3분기 만에 넘어선 실적은 이제 일시적 호황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임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최근 들어 미국과 일본, 서유럽 언론들이 한화에어로스페이스, 현대로템, LIG넥스원, KAI 네 회사의 수주 잔고가 100조 원에 육박한다고 보도하면서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 그 위상이 급속하게 올라가고 있는 한국의 방위산업과 그 미래를 주목하고 있다.
계기는 분명했다. 2022년 폴란드는 K2 전차·K9 자주포·FA-50 경전투기 등 120억 달러가 넘는 한국산 무기 도입을 결정하며, 유럽의 방산 수급 지형을 단숨에 흔들어 놓았다. 러시아의 전면 침공으로 탄약과 포, 장갑차가 눈앞에서 소진되는 상황에서, “몇 년 뒤 인도”를 말하는 기존 서방 업체 대신 “지금부터 순차 인도”를 제시한 국가가 한국이었다.
유럽의 입장에서 한국은 단지 값싼 공급처가 아니다. 전쟁이 현실이 된 이후, “당장 가져다 쓸 수 있는 전력”을 제공하는 거의 유일한 민주국가 공급자다. 이 지점에서 한국 방위산업은 단순한 ‘수출기업’이 아니라, 재세계화·신냉전 구조 속에서 민주진영의 “제2 탄약고” 후보로 떠오르고 있다.
K-방산의 진짜 경쟁력: 가격이 아니라 ‘납기+패키지’
유럽 방산기업들은 수십 년간 구조조정을 거치며 라인과 인력을 줄여 왔다. 냉전 종식 이후 “평화배당”을 누렸던 구조에서 갑자기 전시 생산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설계를 바꾸고, 하청망을 다시 짜고, 야간조를 돌리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든다.
반면 한국은 특유의 제조업 생태계를 방위산업 영역으로 그대로 끌어왔다. 완성품 제작사 뒤에는 수십, 수백 개의 중소 부품업체가 붙어 있고, 이들이 단기간에 증설과 교대근무를 감당하는 구조가 구축돼 있다. “3년 뒤 납품”을 말하는 경쟁자 사이에서, “1~2년 내 초도물량 + 현지 생산 전환 패키지”를 제시하는 순간, 선택지는 사실상 하나로 수렴한다.
패키지도 공격적이다. 단순히 전차·자주포·경전투기만 파는 게 아니라, 탄약·훈련·정비·현지 생산 라인 구축까지 묶어 제안한다. 구매국 입장에서는 단시간에 전력을 끌어올리면서 자국 방산기반까지 키울 수 있는, 정치적으로도 매력적인 묶음이다. 이 구조가 한국 방산 호황의 숨은 엔진이다.
폴란드에서 중동·아세안·남미까지, 형성되는 ‘K-방산 벨트’
이제 수출 지도는 폴란드 주변을 넘어 확장되고 있다. 루마니아와 노르웨이는 K9 자주포와 기타 한국산 장비 도입을 결정하거나 검토 중이며, 체코·슬로바키아 등도 대체 공급처로 한국을 바라본다.
중동에서는 UAE·사우디·이라크가 주요 고객으로 떠오른다. 이 지역은 한때 러시아·중국제 무기의 텃밭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균열이 생겼다. 서방 무기의 정치적 조건과 높은 가격을 부담스러워하는 국가들에게, 한국은 “서방 규범에 묶이되 가격·납기·운용조건이 유연한 대안”으로 보인다. KF-21까지 본격 수출 궤도에 오를 경우, 한국의 역할은 단순 기갑·포병 수출국을 넘어 항공우주·정밀유도무기 분야로 넓어질 수 있다.
아세안에서도 베트남에 대한 K9 수출, 필리핀·인도네시아의 추가 도입 검토 등으로 ‘K-방산 벨트’가 형성되는 조짐이 보인다. 여기에 남미·아프리카는 아직 본계약 규모는 크지 않지만, 협상·타진이 빠르게 늘고 있다. 방산이 재세계화 하에서 한국의 새로운 전략 수출축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현지생산과 기술이전, 기회의 사다리이자 전략적 함정
수출 규모가 커질수록, 구매국의 요구는 ‘완제품 인도’에서 ‘현지생산·기술이전’으로 옮겨간다. 폴란드의 K2PL 현지 생산, 현지 부품 국산화, 탄약·정비 시설 구축 요구는 이제 유럽 거래에서 거의 기본 옵션에 가깝다.
이는 분명 새로운 기회다. 한국 기업은 단순 하청 조립기지에서 출발해, 이제 다른 나라에 공장과 기술을 심어주는 ‘기술 공급국’으로 올라서는 문턱 앞에 서 있다. 중장기적으로는 한국산 설계와 표준을 세계 각지에 심어, 네트워크 효과를 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딜레마도 동시에 커진다. 기술이전이 과도할 경우, 10~20년 뒤에는 한국과 경쟁하는 현지 업체가 등장할 수 있다. 특정 지역이 정정불안에 빠지거나, 정권이 바뀌어 한국과 적대적 관계로 돌아설 경우, 이전된 기술과 라인이 역으로 한국의 안보에 부담을 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 하나의 함정은 산업 구조 측면이다. 현지생산이 확대될수록, 국내 라인의 가동률과 고용이 흔들릴 수 있다. “지금 당장의 대형 수출”과 “10년 뒤 국내 산업 기반” 사이에서 어디까지 기술과 생산권을 내줄 것인가. 방산은 결국 국가 기간산업이자 안보 자산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선택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국가전략의 영역이다.
경제 호황 뒤에 숨은 외교·안보 파급효과
수주잔고 100조 원은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 반가운 숫자다. 고부가가치 제조업 일자리, 중소 부품사 생태계, 첨단 기술의 파급효과까지 생각하면, 방산은 한국형 ‘재세계화 신뉴딜’의 핵심 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외교·안보 관점에서 보면 그림은 복잡해진다. 한국산 무기가 향후 10~20년 간 유럽과 중동, 아세안 전장의 표준 장비가 된다는 것은, 그 지역의 분쟁과 위기가 한국의 전략 리스크로 직결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용국이 분쟁 당사자가 될 경우, “누구에게 팔 것인가, 어느 시점에 공급을 조절하거나 중단할 것인가”는 정치·도덕·동맹의 문제로 한국 정부 앞에 돌아온다.
미·중·러 삼각구도 속에서의 위치도 미묘하다. 한국 방산이 유럽·나토·아세안·중동의 안보 네트워크에 깊이 들어갈수록, 그것은 곧 미국 주도 안보 아키텍처에 한국이 더 깊게 엮인다는 의미다. 이는 대중·대러 관계에서 ‘전략적 모호성’의 공간을 좁히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를 피하려고 특정 지역에 대한 수출을 자제한다면, 방산의 경제적 잠재력은 크게 줄어든다.
결국 K-방산은 한국 경제의 새로운 성장엔진이자, 동시에 한국 외교·안보 전략의 제약조건으로 작동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이다.
‘탄약고 한국’을 위한 세 가지 국가전략 원칙
지금 필요한 것은 개별 계약의 성공 여부를 넘어서는, 국가 차원의 방산 전략 원칙이다. 첫째로, 어떤 나라·체제에 무엇을 어느 수준까지 파는지에 대한 ‘규범과 레드라인’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민주주의·인권·국제규범을 공개적으로 훼손하는 국가에 대한 공격적 무기 수출은, 단기 이익을 얻더라도 장기적으로 한국의 위상과 동맹 신뢰를 갉아먹는다.
둘째로, 기술 이전과 현지 생산의 범위를 국가 차원의 전략 프레임 안에서 관리해야 한다. 특정 핵심 기술·부품·체계는 국내 독점 또는 제한적 이양으로 남겨두고, 어디까지를 공유 가능한 수준으로 볼 것인지, 산업통상·국방·외교가 함께 설계해야 한다. 이때 기준은 “한국의 중장기 군사적 우위와 외교적 지렛대를 해치지 않는 선”이어야 한다.
셋째로, 방산 수출을 단순한 경제 사업이 아니라, 외교·안보 전략과 연동된 “안보 파트너십 패키지”로 설계할 필요가 있다. 동유럽·북유럽·아세안·중동에 대해, 무기 수출과 함께 훈련·연합연습·정보공유·사이버·우주 협력을 패키지로 쌓아 나갈 때, 한국은 ‘무기 판매국’을 넘어 ‘안보 중견국’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성장 엔진이자 리스크 허브가 될 수 있는 K-방산, 선택은 한국의 몫
세계는 재세계화와 신냉전의 궤도에 올라섰고, 그 한가운데서 한국 방위산업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전면에 떠올랐다. 수주잔고 100조 원은 축배의 숫자이면서, 동시에 묵직한 질문이다.
한국은 이 호황을 “민주진영의 탄약고이자 기술 허브”로 도약하는 계기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원칙과 전략 없이 수출에만 몰입하다가 외교·안보적 역풍에 휘말릴 것인가.
지금 필요한 것은 숫자에 취하지 않는 냉정함이다. 어떤 고객과 어떤 동맹, 어떤 규범 위에 한국 방위산업의 세계 전략을 세울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국가적 합의. 그 토대 위에서라면, K-방산의 급성장은 한국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지탱하는 새로운 축이 될 수 있다. 반대로 그 토대가 없다면, “세계가 찾는 무기 수출국 한국”이라는 문장은, 언젠가 “갈등의 중심에 끌려 들어간 한국”이라는 제목으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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