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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장수(長壽)는 재앙"… 美 덮친 '실버 쓰나미', 45%가 빈곤 추락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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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 없는 장수(長壽)는 재앙"… 美 덮친 '실버 쓰나미', 45%가 빈곤 추락 공포

의료비·주거비 폭등에 연금 고갈 '삼중고'… "오래 사는 게 두렵다"
고소득층만 노후자금 13배 축적… 연금제도 붕괴가 부른 '각자도생'
'실버 쓰나미(Silver Tsunami)'가 미국 사회를 덮치고 있지만, 미국 사회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경고가 나왔다. 이미지=빙 이미지 크리에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실버 쓰나미(Silver Tsunami)'가 미국 사회를 덮치고 있지만, 미국 사회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경고가 나왔다. 이미지=빙 이미지 크리에이터
기록적인 숫자의 미국인이 은퇴 연령에 진입하는 이른바 '실버 쓰나미(Silver Tsunami)'가 미국 사회를 덮치고 있지만, 미국 사회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경고가 나왔다. 이는 현재 미국인이 과거 어느 세대보다 오래 살지만, 재정적 안전망은 오히려 헐거워진 '장수(長壽)의 역설'에 노출되었음을 말한다.

악시오스(Axios)는 지난달 29(현지시간) "미국이 은퇴 위기를 맞았다"며 급증하는 노년층 인구와 이를 감당하지 못하는 사회 시스템의 부조화를 집중 조명했다.

"숨 쉬는 것 빼고 다 오른다"… 은퇴자 절반 돈 떨어진다


미국 투자 리서치 기업 모닝스타(Morningstar)가 지난해 내놓은 분석을 보면, 미국인이 65세에 은퇴할 경우 약 45%가 노후 자금 부족을 겪을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미국의 은퇴 연령은 67세로 늦춰졌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고정 수입으로 생활해야 하는 은퇴자들에게 물가 상승은 치명타다. 특히 의료비 본인 부담금이 치솟고 있으며, 자택 돌봄(in-home care) 비용은 물가 상승률보다 3배나 빠르게 오르고 있다. 노년층 상당수가 소득의 3분의 1 이상을 주거비로 지출하는 등 '생활비 압박'이 거세다.

과거 '침묵의 세대(Silent Generation)'나 초기 베이비붐 세대는 사망할 때까지 일정 금액을 받는 확정급여형 연금 혜택을 누렸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딴판이다.

미국 은퇴보장연구소(NIRS)에 따르면 현재 45~60세에 해당하는 'X세대' 가운데 연금 혜택을 받는 비율은 14%에 불과하다.

테레사 길라두치 뉴스쿨(The New School) 경제학 교수는 악시오스와 인터뷰에서 "우리는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는 잘 돌봤지만, 그 이후 세대는 지원이 턱없이 부족하다"고 꼬집었다. 그는 "비용과 부채는 늘어나는데 수명만 길어지면서 노년층이 돈이 바닥나거나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야 하는 상황"이라며 "이미 은퇴 위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웠다"고 진단했다.

401(k)가 부추긴 '노후 양극화'… 소득 격차가 생존 격차로


서류상으로만 보면 미국 은퇴자들은 부유해 보인다. 퇴직연금 계좌인 401(k)100만 달러(14억 원) 이상을 보유한 이른바 '401(k) 백만장자'가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평균의 함정일 뿐, 실상은 심각한 불평등을 가리고 있다.
이달 발표된 한 보고서를 보면, 연 소득 15만 달러(22000만 원) 이상 고소득자는 5만 달러(7300만 원) 미만 저소득자보다 은퇴 자금으로 무려 13배나 많은 돈을 적립하고 있다. 고소득자는 넘쳐나는 자산으로 안락한 노후를 즐기지만, 저소득층은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단순히 '더 오래 일하면 된다'고 말하기 쉽지만, 건강 문제나 노동 시장 환경 탓에 모두가 그럴 수는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믿었던 '사회보장연금'마저 흔들… 정부의 정책 실패


개인의 준비 부족보다 더 큰 문제는 국가 시스템의 붕괴 조짐이다. 켈리 타이코 악시오스 기자는 미래 은퇴자들이 사회보장연금(Social Security) 전액을 받을 수 있을지가 불투명하다고 보도했다.

연방 정부 자료에 따르면 현재 65세 이상 미국인 약 5600만 명이 사회보장연금을 받고 있다. 트랜스아메리카(Transamerica)'2025 은퇴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가구 소득 5만 달러 미만인 은퇴자들에게 사회보장연금은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주 소득원이다.

크리스티 마틴 로드리게즈 네이션와이드 은퇴 연구소장은 "사회보장연금 수령액이 20~25%만 줄어도 이에 의존하는 은퇴자들에게는 파괴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현 수급자의 61%는 지급액이 절반으로 줄면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위기의 본질이 개인의 태만보다는 정부의 정책 실패에 있다고 입을 모은다.

앤드류 빅스 미국기업연구소(AEI) 연구원은 "진짜 은퇴 위기는 정부 쪽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수십 년간 전문가들이 위기를 경고했지만, 아직 터지지 않았을 뿐"이라며 "불과 몇 년 앞으로 다가온 사회보장연금 기금 고갈 문제가 시한폭탄"이라고 지적했다.

빅스 연구원은 사람들이 은퇴 시기를 최대한 늦추는 것이 기금 고갈 문제를 완화하는 데 일부 도움이 될 수는 있다고 덧붙였다. 악시오스는 "미국 은퇴 시스템의 미래가 매우 불투명하다(murky)"고 주장했다.

한국 경제에 던지는 경고, “초고령화 속 '3층 연금' 사각지대 없애야


미국이 겪는 '은퇴의 공포'는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한국 경제에 더 뼈아픈 경고를 보낸다. 한국 역시 베이비붐 세대(1955~1974년생)의 대량 은퇴가 진행 중이며, 노인 빈곤율은 OECD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미국 사례를 반면교사 삼아 한국 정부와 개인이 시급히 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공적 연금 의존도를 낮추고 '다층 소득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미국의 사회보장연금 고갈 위기처럼 한국의 국민연금 역시 재정 안정성 문제를 안고 있다. 연금 전문가들은 "국민연금만으로는 노후 소득 대체율이 충분하지 않다""퇴직연금과 개인연금을 포함한 '3층 연금 체계'를 실질화해 공적 연금의 빈틈을 메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특히 미국의 401(k)처럼 퇴직연금의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제도적 개선(디폴트 옵션 활성화 등)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둘째, '일하는 노후'를 위한 노동 시장 구조 개혁을 주장한다. 미국에서 은퇴 시기를 늦추는 것이 대안으로 제시되듯, 한국도 고령층이 더 오래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단순히 정년을 연장하는 것을 넘어, 직무급제 도입과 재교육 시스템을 통해 고령 인력이 노동 시장에서 생산성을 유지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셋째, 의료·돌봄 비용에 대한 사회적 리스크 분담이다. 미국 은퇴자들이 의료비와 돌봄 비용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현상은 한국에서도 현재진행형이다. 요양 병원비와 간병비 부담은 중산층 노후를 위협하는 가장 큰 뇌관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은퇴 자산 설계 시 생활비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의료비 지출에 대비한 보장성 자산을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결국 '장수'가 축복이 아닌 재앙이 되지 않으려면, 정부는 연금 개혁과 복지 사각지대 해소에 속도를 내고, 개인은 은퇴가 '먼 미래'가 아닌 '당면한 현실'임을 인식하고 선제적인 자산 배분에 나서야 할 때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