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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전력난, SMR이 유일한 해법"…유럽, 원전 '국가 안보 중심'으로 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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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전력난, SMR이 유일한 해법"…유럽, 원전 '국가 안보 중심'으로 격상

빌바오 '엔릿 유럽 2026' 현장 리포트 "대형 원전 넘어 'SMR'이 게임 체인저…탄소중립·산업경쟁력 동시 달성 열쇠"
님비·자금난 넘을 '범유럽 규제 통합' 시급…항공산업 모델 벤치마킹
韓 원전 '골든타임'…시공 넘어 규제·투자까지 아우르는 '팀 코리아' 전략 재편해야
유럽이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과 에너지 안보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대안으로 소형모듈원전(SMR)을 지목했다.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닌 '국가 주권'을 지킬 핵심 수단으로 재정의하고 나섰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유럽이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과 에너지 안보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대안으로 소형모듈원전(SMR)을 지목했다.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닌 '국가 주권'을 지킬 핵심 수단으로 재정의하고 나섰다. 이미지=제미나이3
유럽이 인공지능(AI) 확산에 따른 전력 수요 폭증과 에너지 안보 위기를 타개할 유일한 대안으로 소형모듈원전(SMR)을 지목했다. 이를 단순한 에너지원이 아닌 '국가 주권'을 지킬 핵심 수단으로 재정의하고 나선 것이다.

에너지 전문 매체 엔릿월드(Enlit World)8(현지시각) 나이젤 블랙카비 엔릿 유럽(Enlit Europe) 컨퍼런스 디렉터의 분석을 인용해, 스페인 빌바오에서 열린 유럽 최대 에너지 행사가 원자력 발전을 탄소중립과 산업 경쟁력의 중심으로 복귀시키는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고 보도했다.

'천덕꾸러기'에서 '구원투수'로… 에너지 주권의 중심에 선 원자력


지난 20년 동안 유럽에서 원자력은 정책 혼선과 대중의 불신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빌바오 현장의 분위기는 완전 달랐다. AI 데이터센터와 전기차 보급 확대로 전력망 부하가 한계에 이르고, 지정학적 긴장으로 연료 공급망이 불안해지자 원자력 위상이 급변한 것이다.

블랙카비 디렉터는 이번 컨퍼런스를 갈무리하며 "원자력은 에너지 전환의 주변부가 아니라 주권, 안보, 탈탄소 논의의 한복판에 섰다"고 강조했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가 비약적으로 성장했지만, 날씨에 따라 발전량이 오락가락하는 간헐성 탓에 안정적인 기저전력(Base Load)으로서 원전의 필요성이 재확인된 셈이다.

특히 이번 행사에서 참가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기존의 기가와트(GW)급 대형 원전이 아닌 SMR이었다. 엔지니어와 정책 입안자, 투자자들은 공장에서 모듈 형태로 제작해 현장에서 조립하는 SMR을 유럽의 기후 목표 달성과 산업 경쟁력 유지를 위한 '전략적 필수재'로 평가했다.

3대 장벽, 님비·자금·정치적 파편화


물론 SMR이 장밋빛 미래만 약속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유럽 원전 르네상스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기술이 아닌 '심리와 정치'에 있다고 입을 모았다.

첫째, '님비(NIMBY·내 뒷마당은 안 돼)' 현상이다. 유럽 내 원전의 안전 기록이 우수함에도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 사고의 기억은 여전히 대중의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패널들은 투명한 정보 공개와 지역사회에 돌아갈 경제 혜택을 명확히 제시해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둘째, 보수적인 투자 문화다. 유럽투자은행(EIB) 등이 원전 지원에 나섰지만, 여전히 유럽의 자본은 미국 등 경쟁국보다 신중하다. 엄격한 규제 분류와 통합 전략의 부재는 초기 단계 SMR 프로젝트가 자금을 조달하는 데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셋째, 정치적 의지의 분절이다. 프랑스와 핀란드가 원전 확대를 주도하는 반면, 독일은 탈원전을 고수하는 등 회원국 간 입장이 엇갈린다. 업계 리더들은 "일관된 정책 없이는 기후 목표 달성에 필요한 속도를 낼 수 없다"고 경고했다.

AI 데이터센터의 단짝, SMR의 기술적 도약


빌바오에서 SMR이 주목받은 이유는 명확하다. ▲모듈식 급속 건설 ▲획기적인 안전성 ▲산업적 유연성이라는 세 가지 강점 때문이다.

기존 원전이 건설에 10년 이상 걸리는 것과 달리, SMR은 공장 제작 방식으로 공사 기간과 자본 위험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이는 거대 자본을 투입하기 어려운 소국(小國)이나 지역 단위에서도 원전 도입을 가능하게 한다.

특히 AI와 클라우드 컴퓨팅 확산으로 전력 '하마'가 된 데이터센터에 SMR은 최적의 솔루션으로 꼽혔다. 현장 부지에 직접 SMR을 설치해 안정적인 저탄소 전력을 공급함으로써, 전력망 부담을 줄이고 IT 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고온 열 공급, 수소 생산, 지역 난방 등 활용도가 무궁무진하다.

"항공기처럼 규제 하나로 통일해야"… 유럽의 생존 전략


유럽은 협력을 통해 돌파구를 찾고 있다. 네덜란드의 '아톰 협동조합(Atom Cooperative)'은 지역 주민이 원전 지분을 소유해 수익을 공유하는 모델을 선보여 님비 극복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또한, 16개국 38개 파트너가 참여한 'EasySMR' 프로젝트는 제한된 자금 속에서도 연구와 인허가 과정을 조율하며 상용화 속도를 높이고 있다.

전문가들은 SMR 상용화의 핵심 열쇠로 '범유럽 규제 통합'을 꼽았다. 국가별로 제각각인 인허가 절차가 비용을 부풀리고 배치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항공이나 제약 산업처럼 유럽 전체에 통용되는 단일 규제 프레임워크를 마련해야 민간 투자가 활성화될 것"이라고 제언했다.

블랙카비 디렉터는 "유럽이 정치, 금융, 대중의 정서를 원자력 지지로 결집하지 못하면, 더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를 보유한 국가들에 산업경쟁력을 빼앗길 것"이라며 "지금의 결정이 향후 10년 유럽의 에너지 정체성을 결정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韓 원전·건설업계, “'팀 코리아', 시공 넘어 '규제·투자' 파트너로 진화해야


이번 유럽의 SMR 드라이브는 한국 원전 산업계에 기회이자 위기다. 유럽이 SMR을 단순한 발전소가 아닌 '에너지 주권''산업경쟁력'의 수단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유럽이 SMR의 핵심 장점으로 꼽은 '모듈식 생산''신속한 배치'는 한국 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한 분야다. 두산에너빌리티 등 주기기 제작사와 현대건설, 삼성물산 등 시공사들은 유럽의 제조 인프라 공백을 메울 유력한 파트너다. 유럽이 자체 공급망 구축을 서두르고 있지만, 당장 폭증하는 수요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유럽이 항공산업 수준의 '단일 규제'를 추진하는 움직임은 한국형 SMR(i-SMR) 수출에 중대한 변수다. 프랑스나 영국 주도로 유럽 표준이 굳어지기 전에, 한국 규제 기관과 사업자가 유럽 규제 통합 논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거나, 유럽 인증을 조기에 획득하는 전략이 시급하다.

유럽은 현재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지역 수용성(주민 참여형 모델)을 강조하고 있다. 단순히 발전소를 지어주고 나오는 도급형 사업 방식을 넘어, 한국수출입은행 등 정책 금융을 동반한 지분 투자나, 현지 주민과 이익을 공유하는 운영 모델을 제안하는 '팀 코리아'의 전략 수정이 필요하다. 특히 AI 데이터센터와 연계한 민간 전력 구매 계약(PPA) 시장을 겨냥해 IT 기업과 동반 진출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