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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유럽이 물러나는 동안, 아시아가 전면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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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관의 글로벌 워치] 유럽이 물러나는 동안, 아시아가 전면에 나섰다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으로 확장억제의 축이 이동하고 이에 따라 인도태평양이 새로운 군사 중심지로 부상한 지금 한국이 자체 핵무장 중심으로 추진해야 할 대전략은 무엇인가
중국의 공격적인 군사력 현대화가 동아시아 전역에 군비 경쟁을 촉발하고 있다. 사진=로이터이미지 확대보기
중국의 공격적인 군사력 현대화가 동아시아 전역에 군비 경쟁을 촉발하고 있다. 사진=로이터

질서의 중심이 이동하는 순간


미국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이 유럽을 불편하게 만든 이유는 단순한 외교적 수사가 아니다. 그것은 전후 질서의 핵심 축이 이동하고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미 보수 성향의 정치 저널리즘 웹사이트인 '워싱턴 프리 비콘(The Washington Free Beacon)'은 동맹들에 대한 안보를 더 이상 자동 보증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미국의 새 국가안보전략이 대서양 건너편에는 폭탄처럼 받아들였다고 전한다.

트럼프 2기 행정부는 미국과 패권 경쟁을 벌이고 있는 국가가 중국인 만큼 더 이상 유럽을 세계 질서 유지의 주무대로 상정하지 않는다. 대신 중국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인도태평양 지역을 미국과의 패권 경쟁의 중심 전장으로 규정했고, 그에 따라 동맹국들에게도 명확한 선택을 요구하고 있다.

유럽은 여전히 방위 역량을 논의하고 있지만, 결정과 실행의 속도는 위기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반면 동아시아에서는 이미 변화가 시작됐다. 일본, 한국, 호주, 대만이 동시에 국방 지출을 확대하고, 전략적 역할을 재정의하며, 미국과의 동맹을 새로운 조건 위에서 재구성하고 있다. 이는 우발적 현상이 아니라, 미국이 의도적으로 설계한 질서 전환의 결과다.

트럼프 전략의 핵심은 ‘책임 이전’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메시지는 단순하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질서를 홀로 떠받치지 않는다. 동맹국은 방어의 수혜자가 아니라 공동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전략은 고립주의가 아니라 선택적 개입이며, 비용 회피가 아니라 부담 분산이다.

이 전략의 시험대는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다. 유럽은 러시아를 상대로 아직도 미국의 핵심 억제에 기대고 있지만, 아시아에서는 이미 각국이 스스로 억제력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북한의 핵 고도화, 중국의 핵 전력 증강, 러시아의 유라시아 군사 압박이 동시에 작동하는 공간이 바로 동아시아다.

한국이 ‘모범 동맹’으로 호명된 이유


미국이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입을 통해 한국을 이스라엘, 폴란드와 함께 ‘모범 동맹’으로 거론한 것은 상징적 사건이다. 한국은 전통적으로 미국 의존도가 높으면서도 자율적 전략 공간을 제한받아 왔다. 그러나 트럼프 2기 체제에서 한국은 예외적으로 ‘책임을 인수할 수 있는 국가’로 분류되고 있다.

국방비를 GDP 대비 3.5퍼센트까지 확대하겠다는 약속, 핵추진 잠수함 건조 승인, 국방예산의 구조적 증액은 단순한 군사 강화가 아니다. 이는 한국이 미국의 확장억제를 전제로 하되, 그 불확실성을 스스로 보완할 의지가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그러나 여기에는 결정적인 공백이 있다. 한국으로서는 재래식 전력과 국방비 증액만으로는 북한 핵과 중국 핵이라는 구조적인 핵 위협을 억제할 수 없다는 현실이다. 한국으로서는 미국의 확장억제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동맹 체제를 강화하고 그에 따른 신뢰를 바탕으로 자체 핵무장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억제의 본질은 신뢰 가능한 최종 수단이다


역사적으로 억제는 수치가 아니라 신호의 문제였다. 상대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명확히 인식할 때 억제는 작동한다. 북한은 이미 핵 보유국의 행동 논리를 체득했고, 중국은 핵을 외교와 군사 전략의 통합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미국의 확장억제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자동적이지 않다. 특히 트럼프 2기 체제에서는 미국이 동맹을 지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동맹이 얼마나 준비돼 있는지를 먼저 묻는다. 이는 한국에게 냉정한 질문을 던진다. 미국이 서울을 위해 로스앤젤레스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는 가정은 여전히 유효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불확실해지는 순간, 자체 핵 억제 능력은 선택지가 아니라 대전략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다.

일본과 호주의 움직임이 주는 경고


일본은 이미 핵무장을 하지 않으면서도 핵을 전제로 한 전략 공간을 넓히고 있다. 미국 핵의 일본 내 운용 가능성, 핵추진 잠수함 논의, 미사일 전력 강화는 사실상 잠재 핵국가 전략의 전형이다. 호주는 미국의 핵전력을 자국 영토에 깊숙이 들이는 선택을 했다. 이는 주권 포기의 문제가 아니라, 전략적 생존을 위한 계산이다.

이 두 사례는 한국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핵 문제는 선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는 점이다.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술, 산업, 외교 구조를 갖추는 것은 충분히 현실적이며, 오히려 동맹을 강화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한국 대전략의 핵심은 ‘조건부 자율성’이다


한국이 선택해야 할 길은 동맹 이탈도, 무조건적 의존도 아니다. 그것은 조건부 자율성의 확보이다. 미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되, 미국의 전략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최종 억제 능력을 갖추는 것이다.

자체 핵무장은 이 대전략의 종착점이 아니라 중심 축이다. 이는 한미동맹을 약화시키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미국이 한국을 신뢰할 수 있는 전략 파트너로 인식하게 만드는 조건이 된다. 역사적으로 미국은 책임을 떠안는 동맹을 배제한 적이 없다.

세계 질서의 안정은 강한 주변국에서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가 유럽에 냉정해진 이유는 유럽이 약해서가 아니라, 결정을 미뤄왔기 때문이다. 반면 아시아는 이미 결정을 내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전후 금기를 넘고 있고, 호주는 영토를 내주며, 대만은 생존을 걸고 있다.

한국이 이 흐름에서 뒤처진다면, 선택지는 줄어들 뿐이다. 그러나 한국이 안보와 경제, 산업과 기술, 동맹과 자율을 통합한 대전략을 실행한다면, 2035년 세계 3~5위 선진 강국이라는 목표는 허상이 아니다.

질서는 스스로 방어할 준비가 된 국가 위에서만 유지된다. 유럽이 물러나는 동안, 아시아는 이미 전면에 나섰다. 이제 남은 질문은 하나다. 한국은 관찰자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중국이 러시아와 북한과 함께 불안정하게 만들고 있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 질서를 미국과 함께 수립하고 미국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자체 핵무장의 실현을 통해 그 질서를 함께 지켜나가는 대전략을 추진하는 설계자로 도약할 것인가.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