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일본과의 외교 갈등에서의 전랑 외교 압박과 함께 서해 상에 불법 구조물을 설치하는 등 한국을 상대로 한 회색지대 전술을 결합해 동아시아 질서를 자국 중심으로 전환시키려는 위험한 전략의 정체
이미지 확대보기전랑 외교는 말의 공격이 아니라 공간의 점유로 진화
최근 동아시아에서 관찰되는 중국의 압박 양식은 한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공개적 충돌을 피하면서도 상대의 선택지를 줄이고, 시간이 흐를수록 되돌리기 어려운 기정사실을 쌓는 방식이다. 일본을 둘러싼 외교 갈등에서는 전랑 외교가, 서해에서는 해상 구조물과 부표 같은 물리적 조치가 같은 궤적 위에서 움직인다. 하나는 발언과 정책의 문턱을 바꾸고, 다른 하나는 해양 공간의 경계를 바꾼다. 말과 물체가 결합되는 순간, 질서 변화는 충돌 없이 진행된다.
대만 문제를 건드린 발언에 비용을 부과해 발언의 범위를 좁히려는 시도와, 경계가 모호한 해역에서 구조물을 늘려 존재 자체를 현실로 만드는 시도는 서로 다른 전장처럼 보이지만, 목적은 동일하다. 상대의 정치적 결심을 흔들고, 흔들림이 누적되는 사이 분쟁 공간을 조금씩 기정사실화하는 것이다.
일본과의 갈등에서 보이는 전랑 외교의 작동 원리
타이페이타임스 등 대만 언론은 중국이 최근 일본을 상대로 경제 외교 정치 군사를 결합한 복합 압박을 구사하고 있다고 전한다. 황해에서의 군사 활동, 자위대 항공기에 대한 레이더 조준 같은 행위는 위기 문턱을 조정하면서 상대의 심리를 흔드는 신호로 묘사된다.
서해에서 벌어지는 것은 말이 아니라 말뚝의 정치
한국 언론도 중국의 압박과 관련해 중요한 의제를 제기하고 있다. 중국이 서해에서 협정과 제도적 틀을 우회하거나 악용하면서, 해상 구조물과 부표를 늘려 ‘기정사실’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논점은 단순한 시설 설치 여부가 아니라, 회색지대 전술의 전형으로 읽힌다는 데 있다.
미 외교안보 싱크탱크인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이 문제를 국제적으로 체계화해 제시하고 있다. CSIS가 2001년 한중 어업협정 맥락에서 중첩 수역을 관리하기 위한 잠정조치수역이 존재하며, 중국이 2018년 이후 이 구역 안팎에 해상 구조물을 설치해 왔다는 점을 ‘점진적 주권 확장’ 문제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한국 언론 매체들도 이를 인용해 중국의 설치물 수와 성격, 그리고 회색지대 전술로서의 함의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핵심은 목적의 모호화다. 어업과 기상 관측, 해상 안전 같은 외피를 두르되 시간이 지날수록 군사적 함의가 커지는 방식은 남중국해에서 반복된 패턴과 닮아 있다. 문제는 이 조치가 하루아침에 영유권 주장을 선포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현실’을 바탕으로 다음 단계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전랑 외교와 회색지대 전술이 결합될 때 나타나는 효과
동아시아 질서가 조용히 재편되는 경로는 이런 형태다. 외교적으로는 대만을 말하는 순간 비용이 붙고, 해양에서는 조사하고 확인하려는 순간 마찰이 붙는다. 위기 관리가 점점 더 어렵고 비싸지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미중 패권 경쟁은 동맹의 결속이 아니라 동맹의 피로를 겨눈다
미중 경쟁의 본질은 특정 수역이나 특정 발언을 둘러싼 다툼이 아니다. 누가 더 많은 동맹을 갖느냐가 아니라, 누가 상대 동맹을 더 피곤하게 만들 수 있느냐의 싸움으로 이동하고 있다. 전랑 외교와 회색지대 전술은 모두 동맹의 자동 반응을 지연시키고 내부 조율 비용을 폭증시키는 데 특화돼 있다.
대만 유사시 발언을 둘러싼 압박도 같은 맥락이다. 발언을 철회시키지 못하더라도, 발언이 다음에 반복되기 어렵게 만들면 충분하다. 서해의 구조물도 철거시키지 못하더라도, 조사 시도 자체가 매번 마찰을 낳도록 만들면 ‘관리 비용’이 누적된다. 장기전에서 이 비용은 전략적 균형을 바꾼다.
한국 언론 의제가 던지는 질문을 전략 언어로 바꾸면
한국 언론이 던지는 질문의 중심에는 시간이 있다. 회색지대 전술은 초기 대응이 늦을수록 되돌리기 어려워진다. CSIS 역시 유사한 문제의식 속에서 한국과 미국이 보다 명확한 대응과 좌표 공개 같은 구체 조치를 검토해야 한다는 논점을 제시했다.
질문은 이렇게 정리된다. 서해에서 구조물이 늘어나는 속도만큼, 제도적 기록과 현장 정보와 외교적 문서화도 같은 속도로 축적되고 있는가. 상대가 모호성을 무기로 삼을 때, 우리는 투명성을 무기로 바꾸고 있는가.
한국의 대응은 과잉이 아니라 구조여야
한국의 대응은 찬반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전랑 외교와 회색지대 전술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은 감정적 반발도, 무조건적 침묵도 아니다. 예측 가능성과 일관성을 유지하는 전략적 설계가 필요하다.
첫째는 사실의 전장화다. 좌표, 사진, 시간, 설치 목적에 관한 공적 기록을 축적하고 공유하는 능력은 회색지대 전술을 약화시키는 핵심 수단이다. 모호성을 깰수록 상대의 행동 비용이 오른다. CSIS가 ‘투명성’과 ‘규범’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둘째는 법과 제도의 선점이다. 잠정조치수역과 어업협정의 틀 안에서 위반 여부와 협정 정신을 국제적으로 설명 가능한 언어로 정리해 두지 않으면, 현장 조치가 곧 정치적 공방으로 소모된다. 회색지대는 군사 문제가 되기 전에 법적 문제로 먼저 걸어야 한다.
셋째는 비례성의 설계다. 대응은 단순히 같은 형태의 구조물을 세우는 문제로만 환원될 필요가 없다. 상대가 기정사실을 쌓는다면, 우리는 기정사실을 되돌릴 수 있는 비용을 상대에게 누적시키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 수단은 기술, 법, 동맹 조율, 감시 능력, 항행과 조사 활동의 지속성 같은 복합 패키지로 구성될 수 있다.
결론, 전랑 외교 서해에서 실험되고 있다
일본을 겨냥한 전랑 외교는 동아시아의 말의 경계를 바꾸려 한다. 서해의 구조물 논란은 동아시아의 공간의 경계를 바꾸려 한다. 이 둘은 따로가 아니라 함께 움직이며, 미중 패권 경쟁의 장기 구조 속에서 동맹국들의 의사결정 비용을 올리는 방향으로 설계된다.
회색지대 전술은 방치하면 자연히 분쟁이 되고, 분쟁이 되면 되돌리기 어렵다. 지금 필요한 것은 큰 소리가 아니라, 기록과 제도와 지속적 현장 활동이라는 조용한 힘이다. 이를 바탕으로 이재명 정부가 해야 할 것은 중국 정부로 하여금 서해 상의 불법적인 구조물 설치가 계속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나가는 것이다.
이교관 글로벌이코노믹 대기자 yijion@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