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 비용만 500억 증발… 낡은 규제가 ‘제조업 리쇼어링’ 발목
13년 공백에 사라진 건설 노하우… “미국엔 반도체 공장 지을 ‘손기술’이 없다”
삼성·SK도 같은 난관… “보조금보다 시급한 건 규제 개혁과 생태계 복원”
13년 공백에 사라진 건설 노하우… “미국엔 반도체 공장 지을 ‘손기술’이 없다”
삼성·SK도 같은 난관… “보조금보다 시급한 건 규제 개혁과 생태계 복원”
이미지 확대보기디지타임스는 30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의 팟캐스트 ‘더 데일리’를 인용해, TSMC가 1만 8000개에 달하는 복잡한 규제와 숙련공 부족, 심각한 문화적 갈등으로 인해 막대한 비용과 시간을 허비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단순한 개별 기업의 애로사항을 넘어, 기술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미국이 반드시 풀어야 할 구조적 난제라고 지적했다.
서류 작업에만 500억 원… 낡은 ‘토지 규제’가 발목 잡다
TSMC가 직면한 가장 큰 벽은 미국의 복잡하고 파편화된 행정 절차였다. NYT 보도에 따르면 TSMC는 애리조나 공장을 짓기 위해 무려 1만 8000개에 이르는 서로 다른 규정과 인허가 항목을 일일이 검토하고 지켜야 했다.
특히 ‘지역 용도 구역(Zoning code)’ 규정이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 쉽게 말해, 미국은 땅마다 “여기에는 주택만 지어라”, “저기에는 3층 이하 건물만 지어라” 하는 식의 아주 세세하고 오래된 동네 규칙들이 정해져 있다. 한국이나 대만은 국가가 지정한 산업단지에 공장을 지으면 정부가 알아서 규제를 한 번에 풀어주지만, 미국은 각 마을이나 시에서 정한 수십 년 전의 낡은 규칙까지 다 지켜야 한다. 최신 반도체 공장을 짓는데 1980년대 주택 건설 규칙을 적용받는 셈이다. TSMC는 이 규정을 현대식 공장에 맞게 고치느라 관련 서류 비용으로만 약 3500만 달러(약 500억 원)를 지출했다.
심지어 공사장에서 흙더미 하나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단순한 작업에도 15개의 별도 허가증과 검사가 필요했다. NYT는 “미국의 관료주의는 법적으로는 꼼꼼할지 몰라도, 속도와 효율이 생명인 첨단 제조업에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이라고 비판했다.
13년의 공백… “미국엔 공장 지을 ‘근육 기억’이 없다”
인력 문제 역시 심각했다. 현지 노동자들의 숙련도 부족은 이른바 ‘근육 기억(Muscle memory) 상실’로 설명된다.
운동선수가 오랫동안 운동을 쉬면 몸이 굳어 예전 실력이 안 나오는 것처럼, 미국 건설 업계도 지난 13년 동안 대규모 첨단 반도체 공장을 지어본 적이 없다 보니 현장 노동자들이 ‘어떻게 지어야 하는지’ 그 감각과 기술을 잊어버렸다. 정밀한 배관을 연결하고 먼지 하나 없는 클린룸을 만드는 것은 책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수많은 반복 숙달로 몸에 익히는 기술인데, 미국에는 이런 경험을 가진 노동자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TSMC는 공기 지연을 막으려 대만 기술자를 데려왔지만, 이는 곧바로 “미국 일자리를 뺏는다”는 현지 노조의 반발을 샀다. 여기에 밤낮없이 일하는 대만식 ‘24시간 대기 문화’와 오후 5시면 칼같이 퇴근하는 미국식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문화’가 충돌하며 현장은 소송과 비난으로 얼룩졌다.
삼성·SK도 ‘남 일 아니다’… 깊어지는 ‘아메리칸드림’의 그늘
이러한 ‘미국병(病)’은 비단 TSMC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 기업들도 비용 상승과 규제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는 삼성전자는 당초 170억 달러(약 24조 원)로 예상했던 투자비가 인건비와 자재비 급등 탓에 250억 달러(약 36조 원) 이상으로 불어났다. 이에 따라 삼성전자는 당초 2024년 말로 계획했던 가동 시점을 2026년 이후로 연기하는 등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인디애나주에 패키징 공장을 건설 중인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말(2024년 말) 미국 상무부와 4억 5000만 달러(약 6600억 원) 규모의 칩스법 보조금 지원 최종 계약을 체결하며 자금 불확실성을 일부 해소했다. 그러나 현지의 인플레이션에 따른 건축비 상승과 전문 인력 부족 등 수익성 리스크는 여전하다. SK하이닉스는 여러 난관에도 불구하고 오는 2028년 하반기 가동 목표를 맞추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보조금 지급만으로는 무너진 제조업 생태계를 복원할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경계현 전 삼성전자 사장은 과거 강연에서 “미국에서 공장을 짓는 것은 한국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든다”고 토로했다.
NYT는 “1만 8000개의 규제 장벽을 걷어내고, 현장 기술 인력을 길러내는 직업 교육 시스템 없이는 제2, 제3의 TSMC 사태가 반복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이 진정한 ‘제조업 강국’으로 복귀하려면 자금 지원을 넘어, 규제 혁파와 사회적 합의라는 더 큰 산을 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