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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 북한 제재 위반 주주 집단소송…런던 고등법원서 '16년 공시 누락' 법적 책임 정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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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 북한 제재 위반 주주 집단소송…런던 고등법원서 '16년 공시 누락' 법적 책임 정조준

주주 100여 명, 2007∼2023년 핵심 정보 미공개로 손해배상 청구…폭스 윌리엄스·스튜어츠 이중 소송 동시 점화
6억 3500만 달러 합의금 낳은 '북한 담배 밀수출'의 후폭풍…다국적 기업 공시 의무 기준 새 이정표 될 듯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AT)를 상대로 현직·전직 주주 100여 명이 런던 고등법원에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공식 제기했다. 이미지=제미나이3이미지 확대보기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AT)를 상대로 현직·전직 주주 100여 명이 런던 고등법원에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공식 제기했다. 이미지=제미나이3
국제 제재 위반 사실을 알고도 투자자에게 침묵했다면, 그 침묵의 값은 얼마일까. 런던 고등법원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려야 할 처지에 놓였다.

영국 금융 전문지 글로벌 뱅킹 앤 파이낸스 리뷰(Global Banking & Finance Review)5(현지시각),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AT)를 상대로 현직·전직 주주 100여 명이 런던 고등법원에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공식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소장이 접수된 날짜는 지난달 27일이다.

소송의 핵심은 단순하다. BAT2007년부터 2023년까지 16년에 걸쳐 북한 내 사업 운영과 관련한 중대 정보를 주식시장에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투자자들이 마땅히 알았어야 할 법적 리스크를 경영진이 의도적으로 봉인해 온 결과, 주주들이 고스란히 경제적 손실을 떠안았다는 주장이다.

63500만 달러 합의의 '이면'…공시 의무 위반이 핵심 쟁점


이번 소송의 직접적인 도화선은 20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BAT는 그해 자회사가 2007년부터 2017년까지 10년간 북한에 담배 제품을 판매하고, 이 과정에서 은행 사기 행위를 통해 미국의 대북 제재를 위반한 사실을 공식 인정했다. 미국 당국과의 합의 결과, BAT63500만 달러(한화 약 9270억 원)의 합의금을 지급하는 데 동의했다.

원고 측을 대리하는 법률회사 폭스 윌리엄스(Fox Williams)BAT가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수년간 주식시장에 보고하지 않았다는 점을 집중 공략하고 있다. 국제 금융 규범상 상장 기업은 기업가치나 투자 판단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실을 지체 없이 시장에 공시할 의무를 진다. 원고 측은 BAT가 이 의무를 16년간 방기했다고 본다.

주목되는 것은 이날 고등법원에 또 다른 주주 그룹이 별도 소송을 동시에 제기했다는 점이다. 이 그룹을 대리하는 법률 사무소 스튜어츠(Stewarts)는 구체적인 내용 공개를 거부했지만, 두 개의 독립적인 법무법인이 동일한 날 런던 고등법원에 서로 다른 소장을 접수했다는 사실 자체가 BAT를 향한 법적 압박이 단일 사건이 아님을 시사한다.

'제재 위반 + 공시 은폐' 이중 타격…ESG 리스크로 번질 가능성


이번 사태가 단순한 법적 분쟁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금융권 안팎에서 쏟아지는 이유는 두 가지 리스크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미국 제재 위반이라는 실체적 위법 행위다. BAT는 이미 2023년 미국 당국과의 합의를 통해 이를 사실상 자인했다. 둘째는 그 위반 사실을 주주들로부터 숨겼다는 절차적 위반이다. 영국 법원은 이번 재판에서 특히 후자, BAT 이사회가 언제부터 어디까지 북한 사업 실태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그 정보를 시장에 공개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고의적 판단이었는지를 집중적으로 들여다볼 전망이다.
한국 자본시장과의 접점도 무시할 수 없다. 국민연금을 비롯한 국내 기관투자자들은 글로벌 소비재 기업의 주요 주주로서 BAT 지분을 간접 또는 직접 보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투자 기준을 강화하고 있는 국내 연기금 입장에서, 대북 제재 위반 기업에 대한 노출이 확인될 경우 지분 매각 등 후속 조치 여부를 검토해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

BAT 공식 입장 없어…소송 가액 미산정, 장기전 불가피


BAT 측은 이번 소송에 대한 공식 논평 요청에 현재까지 즉각적인 답변을 내놓지 않고 있다. 소송의 청구 금액도 아직 구체적으로 산정되지 않은 상태다. 다만 2023년 미국 합의금 규모(63500만 달러)와 소송 기간(16)을 감안하면, 향후 청구액 산정 과정에서 손해배상 규모가 상당한 수준에 이를 가능성이 제기된다.

영국 법조계에서는 이번 사건이 단지 한 기업의 법적 패소 여부를 넘어, 다국적 기업이 지정학적 리스크가 높은 지역에서 사업을 운영할 때 공시 의무를 어느 수준까지 엄격하게 이행해야 하는지를 가르는 판례로 기록될 것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과거에도 유사한 사례는 있었다. 2012년 영국 BAE 시스템즈가 뇌물 공여 사실을 사전에 공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주들로부터 집단소송을 당했고, 2016년 브라질 페트로브라스 사태 역시 비리 사실 은폐에 따른 투자자 손해배상 소송으로 확산된 사례다. BAT 사건이 이들 선례와 같은 궤적을 밟는다면, 최종 배상 확정까지 수년에 걸친 법정 공방이 불가피하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번 소송이 결국 "기업이 불편한 진실을 숨길수록, 그 침묵의 대가는 배가된다"는 교훈을 글로벌 자본시장에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사건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BAT가 런던 법정에서 어떤 선택을 할지, 그리고 그 선택이 다국적 기업 공시 문화의 기준선을 어디에 새로 그을지가 이 재판의 진짜 판결문이 될 전망이다.


박정한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par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