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호르무즈發 에너지 쇼크, '녹색 안보'의 환상 깨나… 글로벌 에너지 재편의 민낯

글로벌이코노믹

호르무즈發 에너지 쇼크, '녹색 안보'의 환상 깨나… 글로벌 에너지 재편의 민낯

지정학적 위기, 신재생 에너지 전환의 '촉매' 아닌 '예산 족쇄'로 작용
70년대 원전 붐과 달리 현대는 복잡한 규제와 인허가 장벽에 발목
파키스탄·베트남 등 아시아 국가들, 생존형 분산 에너지로 돌파구 모색
에너지 안보를 명분으로 한 녹색 전환이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정부의 보조금 편중으로 인해 기대만큼 가속화되지 않고 있다.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에너지 안보를 명분으로 한 녹색 전환이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정부의 보조금 편중으로 인해 기대만큼 가속화되지 않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에너지 공급망 위기가 닥칠 때마다 신재생 에너지 전환이 국가 안보의 해법으로 제시되지만, 실제 데이터는 지정학적 충격이 오히려 에너지 전환의 물리적·재정적 병목 현상을 심화시킨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5일(현지시각) 보도를 통해 에너지 안보를 명분으로 한 녹색 전환이 복잡한 인허가 절차와 정부의 보조금 편중으로 인해 기대만큼 가속화되지 않고 있다고 분석했다.

에너지 위기가 부른 보조금의 역설… 녹색 예산 잠식


지정학적 리스크가 발생하면 에너지 수입 의존국은 공급망 취약성을 해결하기 위해 신재생 에너지로 눈을 돌린다. 하지만 실제 데이터는 위기가 반드시 전환 속도를 높이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에너지 연구원 아나스타시야 파블렌코와 알레 체르프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유럽 내 풍력 발전 설치량은 이전 추세와 비교해 큰 변화가 없었다.

이는 위기 상황에서 정부 예산이 단기적인 민심 달래기에 쏠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당시 유럽 각국 정부는 치솟는 가스 요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천문학적 규모의 에너지 보조금을 집행했다.

이 과정에서 친환경 에너지로의 근본적 전환을 이끌 열펌프 보급이나 에너지 효율 개선 사업에 투입될 예산이 오히려 줄어드는 역설이 발생했다.

보프케 훅스트라 유럽연합(EU) 기후담당 집행위원이 "그린딜이 안보의 정답"이라고 강조했음에도, 현장에서는 높은 초기 설치 비용과 정부 예산의 한계가 발목을 잡은 셈이다.

규제 장벽과 부지확보… 원전 붐 재현 어려운 현대의 환경


과거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에는 원자력 발전소가 에너지 안보의 구원투수로 빠르게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에너지 환경은 훨씬 복잡한 이해관계에 놓여 있다.
체르프 교수는 현재의 에너지 전환이 사회적·기술적 제약이라는 거대한 벽에 가로막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풍력과 태양광은 원자력이나 화석 연료 발전소에 비해 훨씬 넓은 부지가 필요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주민 갈등과 환경 영향 평가 등 복잡한 인허가 절차가 수년간 이어진다.

위기가 닥쳤다고 해서 이러한 법적 절차를 건너뛸 수 없다는 점이 녹색 전환의 물리적 한계로 작용한다. 실제로 독일 등 주요국에서 신규 풍력 단지 건설이 기획에서 완공까지 10년 가까이 걸리는 현상은 에너지 위기에 즉각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뒷받침한다.

아시아 수입국의 생존형 '분산 에너지' 전략


정부 주도의 대형 프로젝트가 주춤하는 사이, 아시아 에너지 수입국에서는 실질적인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파키스탄이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2022년 에너지 위기로 액화천연가스(LNG) 가격이 폭등하고 순환 정전이 반복되자, 가계와 민간 공장을 중심으로 소형 태양광 설치가 급증했다.

이는 정부 정책이라기보다 전력난에서 살아남기 위한 민간의 자구책이었다. 저렴한 중국산 기술을 활용한 소형 태양광 보급으로 파키스탄의 LNG 수입 수요는 눈에 띄게 줄었다.

베트남 역시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재생 에너지로 충당하려는 계획을 추진 중이지만, 계통 연계와 자금 조달 문제로 최종 확정은 지연되고 있다.

그랜트 하우버 에너지경제·재무분석연구소(IEEFA) 아시아 전문가는 현재의 중동 위기가 화석 연료 의존의 치명적 비용을 재확인시켜주고 있으며, 대규모 중앙집중형 방식보다 민간 주도의 분산형 에너지 시스템이 실질적인 돌파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에너지 전략의 전환점… 안보와 탄소중립의 접점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은 에너지 안보와 녹색 전환 사이의 시간적 괴리를 여실히 드러낸다. 위기시 화석 연료를 즉각 대체할 수 있는 만능열쇠는 존재하지 않는다.

향후 에너지 시장의 주도권은 규제 혁신을 통해 재생 에너지 설치 기간을 단축하고, 보조금 정책을 소모적인 요금 지원에서 생산적 설비 투자로 얼마나 빠르게 전환하느냐에 달려 있다.

중동발 에너지 불안은 녹색 전환이 환경 운동을 넘어 국가 생존을 위한 가장 치열한 경제 전략임을 시사한다.


서진욱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