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언제 터질지 모른다"…EU 9개국이 공동 서한 보낸 러시아 LNG선, 지중해 2주 표류의 진실

글로벌이코노믹

"언제 터질지 모른다"…EU 9개국이 공동 서한 보낸 러시아 LNG선, 지중해 2주 표류의 진실

드론 공격으로 반파·무인 표류, 6만t LNG·900t 경유 탑재한 채 이탈리아 연안 위협
구조하면 러시아 제재 무력화, 방치하면 생태 재앙…유럽이 선택지 없는 딜레마에 빠졌다
이탈리아 섬 인근에 표류 중인 러시아 유조선. 사진=연합뉴스이미지 확대보기
이탈리아 섬 인근에 표류 중인 러시아 유조선. 사진=연합뉴스
드론 공격으로 반파된 러시아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이 승무원도, 동력도 없이 지중해를 2주 넘게 떠돌면서 유럽연합(EU) 9개국이 "EU 해역 심장부에서 생태 재앙이 임박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인도네시아 경제전문매체 IDN 파이낸셜스(IDN Financials)는 18일(현지시각) 로이터 통신을 인용해, 이탈리아·프랑스를 비롯한 EU 9개 회원국이 유럽 집행위원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 러시아 LNG 운반선 '아틱 메타가즈(Arctic Metagaz)'의 표류 사태에 긴급 대응을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가스 시한폭탄' 지중해 표류…이탈리아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다“


지난 3일(현지시각), 몰타 남동쪽 약 170해리 해상에서 아틱 메타가즈에 잇따른 폭발이 발생했다. 이탈리아 내각 사무처장 알프레도 만토바노는 이 선박을 "가스로 가득 찬 시한폭탄"이라고 규정하며 "언제든 폭발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탈리아 당국에 따르면, 아직 온전한 선체 내부에는 경유 약 900t과 LNG 6만t 이상이 실려 있다.

CNN 선박은 이미 30도 가량 기울어진 상태에서 갑판이 주저앉고, 배관이 뒤틀리고, 함교가 불에 탄 채 높이 3.4~4m의 파도를 견디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폭발로 약해진 선체가 파도의 충격을 버티지 못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길이 277m, 선령 23년의 이 선박은 원래 노르웨이 베르게센(Bergesen)이 '베르게 에버렛(Berge Everett)'이라는 이름으로 운항했다.

지난 4년 사이 이름을 4번, 선적을 7번, 운항사를 8번 갈아치웠으며, 지금은 러시아 국적으로 등록돼 있다. 승무원 30명은 전원 구명보트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세계자연기금(WWF)은 사태 초기부터 "최고 경계" 수준으로 상황을 주시하고 있다.

LNG는 섭씨 영하 162도에 저장되는데, 누출 시 해양 생물에 치명적인 극저온 효과를 일으키고, 육지 생물에도 위험한 가스 구름을 형성하며, LNG의 주성분인 메탄이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를 급격히 끌어올릴 수 있다.

최악의 경우 방출된 LNG에 불이 붙으면 대형 폭발로 이어진다. WWF는 이 해역이 참다랑어와 황새치의 주요 이동 경로이자 지중해 전체를 통틀어 생물 다양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지적했다.

EU의 '이중 덫'…구조도 방치도 불가능한 딜레마


EU 9개국이 집행위원회에 보낸 서한은 "선박의 불안정한 상태와 특수 화물의 성격이 맞물려 EU 해양 공간 심장부에서 대형 생태 재앙이 임박했다"고 명시했다.

서한은 동시에 "감시나 기술 지원을 포함한 어떠한 대응도 EU 대러 제재 체제의 완결성과 실효성, 억지력을 훼손할 수 있다"고 우려를 담았다.

이것이 이번 사태를 단순한 해양 사고와 구별 짓는 핵심이다. EU는 아틱 메타가즈를 러시아의 대서방 제재 우회 수단인 '그림자 함대' 소속으로 지정하고 미국·영국과 함께 제재 목록에 올렸다.

이 선박은 러시아 가스업체 노바텍(Novatek)이 미국 제재 대상인 '아틱 LNG 2' 사업의 가스를 운반하는 데 활용됐으며, 지난해 여름에는 결빙 항행 능력이 없음에도 북극 항로에 투입됐다가 해빙에 갇혀 쇄빙선 도움을 받기도 했다.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 마리아 자하로바는 공식 성명에서 "국제법상 표류 선박 처리와 환경 재앙 방지 책임은 연안 국가에 있다"며 구조 의무를 유럽 쪽으로 넘겼다.

"선박 소유주와 선적 국가인 러시아의 추가 관여는 구체적 상황에 달려 있다"고 직접 개입에도 선을 그었다. 선박의 러시아 측 실소유주 LLC SMP 테크매니지먼트와 이탈리아·몰타 당국 간 공식 접촉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우크라이나 전쟁, 지중해까지 번지다…러 LNG 수출로도 직격탄


해운 업계에서는 이번 공격이 "분쟁 상황에서 LNG 운반선이 타격을 입은 사상 첫 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노바텍이 아틱 LNG 2 사업에 동원할 수 있는 LNG 운반선은 12척에 불과한 터라, 선박 1척을 잃은 것만으로도 사업의 수출 능력과 물류 유연성이 크게 줄었다.

아틱 메타가즈 폭발 직후 러시아 LNG 운반선 최소 5척이 지중해 항로를 버리고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경유하는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일부 선박은 항해 중간에 방향을 돌렸고, 또 다른 LNG 운반선은 수에즈 운하 북쪽 입구 포트사이드 외해에서 지중해 진입을 포기한 채 대기했다. 러시아 LNG 수출의 핵심 동맥인 지중해 루트가 사실상 봉쇄된 것이다.

이탈리아 시민보호청은 선박이 리비아 수색구조 책임 수역으로 남하하고 있다고 확인했다. 이탈리아 당국은 선박이 여전히 가스를 누출하며 "상당한 위험"을 초래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LNG 수입 시장에 대한 직접적 영향은 지금 당장은 제한적이라는 게 에너지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다만 러시아 LNG 운반선들의 지중해 루트 이탈이 장기화하면 글로벌 LNG 현물 시장의 공급 불안을 자극해 수입 단가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 안팎에서 나온다.

라트비아 에너지 장관은 "지금까지 환경 재앙이 발생하지 않은 것 자체가 다행"이라는 말로 유럽의 긴박한 분위기를 압축했다.

2주 넘게 지중해를 떠도는 '가스 시한폭탄'은 EU의 제재 딜레마와 전쟁의 해상 확전이라는 두 개의 뇌관을 동시에 안은 채 리비아 수역을 향해 느리게 남하하고 있다.


진형근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jinwook@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