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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경제대통령' 김재익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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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화국 경제대통령' 김재익은 누구인가?

최근 평전 출간…31년 지났어도 여전한 그림자
[글로벌이코노믹=허경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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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0년대 초반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 호황기였다. 세계 경제의 저금리, 저환율, 저유가가 맞물려 성장률, 물가, 국제수지가 모두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이런 성장에 대해 혹자는 당시 세계 경제가 호황기였기에 누가 정권을 잡더라도 성장했을 것이라는 분석을 펼치지만 이는 당시 김재익 경제수석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비정상적 경로로 정권을 찬탈했던 당시 전두환 대통령조차 ‘당신이 경제대통령’이라며 경제를 그에게 일임했을 정도였다. 김재익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지난 15일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는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참석한 ‘김재익 평전’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이를 계기로 5공화국 경제대통령 김재익에 대해서 알아봤다. <편집자 주>

군부 쿠테타라는 비정상적 방법으로 정권을 잡은 당시 전두환 전대통령은 당연히 자신에게 정통성과 정당성이 결여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경제안정화로 그 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으며 이런 전두환의 경제안정화 정책에 기여한 인물, 아니 전두환의 경제관을 만들어낸 인물이 고 김재익 수석이다.

김재익은 전두환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으로 있을 당시부터 그의 경제 가정교사로서 백지 상태였던 전두환의 경제관을 자신의 생각으로 물들였으며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전두환 정권이 경제를 시대에 맞게 올바로 이끌어내는데 큰 공헌을 했던 인물이다.
전두환은 국보위 결성 이전부터 경제에 관심이 있었다. 79년 박봉환 경제과학심의회 사무국장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실로 불려간다. 전두환은 그에게 경제 공부를 시켜줄 것을 부탁했고 그렇게 시작된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가 바로 김재익이다. 김재익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와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일하다가 미국으로 유학해 하와이대를 거쳐 스탠퍼드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75년부터 박정희 정권 하의 경제기획원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정부 주도의 성장정책에 반하는 안정, 자율, 개방을 골자로 하는 그의 경제관은 관료주의의 벽에 막혀 맥을 추지 못했고 급기야 사표를 쓸 결심까지 한다. 그 wm음에 전두환 당시 국보위 위원장의 호출을 받게 된 것이다.

다행히 전두환은 경제 공부에만큼은 유별날 정도로 열과 성을 다했다. 김재익 수석의 영향력은 1883년10월9일 아웅산묘소 테러사건으로 김재익이 순직한 다음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경제안정화를 최우선으로 삼을 정도로 뇌리에 깊이 박혔다. 80년대 초의 격변기 대한민국에 경제발전의 근간을 이루게 한 것이다. 당시 전두환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직관력이 뛰어나고, 기억력이 좋아 경제 공부에 있어서 왕성한 소화력을 발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제수석으로서 각하를 모시는 데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조언대로 정책을 추진하시려면 엄청난 저항에 부딪힐텐데, 그래도 끝까지 제 말을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러 말 할 것 없어,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김재익이 전두환 정권의 경제 수석으로 임명될 때 나눴다는 유명한 대화다. 이같은 전두환의 전폭적 지원은 김재익의 이상론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확고한 지지 기반이 됐고 결국 유례없는 성장의 기폭제가 됐다.

김 수석이 자신의 정책을 시행하기에 앞서 가정교사 시절 전두환에게 그에 수반되는 중요한 경제원리를 설명한 적이 있는데, 이것은 훗날 어떤 정책에 대해서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

지 하에 시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것은 첫째, 경제현상이란 것은 수요와 공급에 의한 것이므로 정부가 개입해 조정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요, 둘째는 나라든 군대든 가정이든 흑자를 내야 함은 당연하고 그러려면 고통을 참아야하는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셋째는 경제에서는 실질 개념이 중요하니 명목상으로 오르고 내려가는 모든 현상에 현혹돼서는 안된다는 조언이었다.

대통령의 이해 아래 김 수석은 한국경제를 살려나갈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그것을 당시 무소불위 대통령의 힘을 빌려 실현해나간 것이다. 이후 김재익은 한국경제 체질 개선에 앞장선다. 종래의 성장 위주 정책에서 벗어나 안정화를 통해 경제기반을 확고히 해 10년, 20년 후를 바라볼 수 있게 만들고자 한 것이다.

김재익은 스탠포드대에서 계량경제학을 전공하면서 경제사상가 루트비히 폰 미제스를 접한다. 단기적으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하나 종국적으로는 시장의 자율성에 맡겨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그런 그의 생각은 독재정권의 전폭적 지원으로 실현된다.

전두환 정권은 김재익의 주도 하에 82년 한자리 수 물가상승률을 기록하며 경제안정화를 이뤄나간다. 이런 자신감 속에 83년부터는 본격적인 물가잡기에 나서 세출 예산을 동결하고 임금이건 배당이건 무조건 한 자리 수로 옭아매는 정책을 통해 경제안정화를 공고히 하고 경제발전과 자율화를 꾀했다. 당시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한 전두환 정권으로서 곳간을 풀기는 커녕 세출을 동결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으며 이는 전 대통령의 김 수석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인 것이다.

당시 김재익이 꺼내든 개혁 카드는 크게 부실기업 정리와 중화학공업 일원화 작업을 통한 기업 경쟁력 강화, 3세(소득세, 소비세, 재산제)론을 통한 세제 개혁, 금융실명제를 통한 지하경제 척결과 공정거래제도의 부활, 물가안정을 위한 정부예산 동결, 미래를 주도할 통신사업의 육성 등이 있다. 이것은 현재의 공정위, 금융실명제 그리고 현재의 KT가 존재하는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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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정권 주도 하에 중구난방으로 난립한 기업들은 70년대 후반 오일쇼크로 휘청이게 된다. 성장 속에 가리워졌던 거품이 빠지기 시작한 것이다. 소비재의 부족으로 인한 고인플레는 무서운 속도로 치솟고 있었으며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도 떨어드려 국제수지 적자를 낳았다. 1980년의 경제성장률은 -3%였다. 정부의 결단이 필요했다. 부실기업들을 정부 지원으로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정리를 통해 건강한 기업만 남길 것인지 갈림길에 서 있던 것이다.

김재익은 부실기업 정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와 더불어 중화학공업의 일원화 정책을 통해 몰아주기식 지원으로 경쟁력 상승을 도모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게 터진 유명한 사건이 현대-대우 일원화 작업이다. 김 수석은 경쟁이 치열한 분야에 업종별 독점적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부실한 기업과 신규 기업의 참여를 억제해 단기적 집중 발전을 꾀할 요량으로 발전설비

사업과 자동차사업을 각각 분할할 것을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현대의 발전설비, 대우의 자동차 선택을 예상했으나 예상치 못한 현대의 자동차사업 선택으로 일원화는 망가졌다. 김 수석의 유일한 오판으로 기록되는 사안이다.

하지만 이런 사업을 통해 대한민국 경제는 85년부터 부실기업 인수로 한국경제의 체질개선에 나름의 성공을 거두는데 나름 큰 밑거름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김재익의 세재론은 "세율을 낮추고 세금을 더 걷는다"는 슬로건 하에 소득이 발생하는 데에 대한 세금(소득세)과 소비가 이뤄진 곳에서 걷는 세금(소비세), 재산의 취득. 양도 등에서 걷는 세금(재산세)만 제대로 되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가 법인세와 관세를 부가가치세에 흡수시켜 부가세율만 올리면 된다한 까닭은 ‘외자 유치’였다. 법인세율을 낮추면 외국기업이 우리나라에서 기업하기 좋은 환경이 되고, 자연히 외자를 유치해 자본으로 사용할 수 있으리라 본 것이다. 또 관세를 없애면 그를 통해 수출 및 내수시장 활성화를 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들어 동북아 허브니 하는 것은 사실상 김재익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러한 김재익의 주장은 이상론으로 치부되어 실정도 모르는 돈키호테 같은 인물로 낙인 찍힌다.

그러나 현세에 와서 각 지자체 장이 매년 해외로 외자의 유치 일정에 공을 들이는 것을 보면 결국 김재익 생각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특히 김재익의 생각은 전두환 대통령의 금융실명제 추진을 야기했으며 결국 김영삼 정부 하에 금융실명제가 전폭적으로 실현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밖에 김재익의 업적 중 하나가 통신혁명이다. 경제학자인 그가 어떻게 통신산업에 눈을 돌리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김 수석은 현 KT의 전신을 만들며, 한국 IT산업의 밑그림을 80년대 초에 이뤄냈다. 그는 80년 9월 국보위 일을 보기 시작하면서 당시 국보위 상공자원분과위 소속 오명 위원과 의기투합해 미래산업을 주도할 전자반도체, 통신산업에 대한 기반사업을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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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3개월만에 '전자산업육성방안'을 마련, 전자산업의 청사진과 구체적 실현방안까지 내놓게 된다. 첫 사업은 기계식 교환기를 전자식으로 바꾸는 작업이었고 이는 전화선을 팩시밀리, 컴퓨터에 연결해 전자통신이 가능케 한 원동력이 됐을 뿐 아니라 전화기 업체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이 뿐 아니라 반도체, 컴퓨터, 전자교화기 부문을 3대 전략사업으로 정하고 86년 기계분야를 앞지르고 전자통신분야는 최대 주력산업으로 발돋움하기에 이른다. 김 수석은 안타깝게도 고작 45세 나이로 83년 버마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목숨을 잃는다.

그러나 그가 한국 경제에 기여했던 3년의 세월동안 한국경제는 안정화로의 체질 개선의 밑바탕을 쌓을 수 있었고 전두환의 스승으로서 당시 현실에 맞는 경제정책을 추진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거시적으로 예산개혁, 금융실명제, 대기업집단에 대한 제도적 견제, IT산업에 대한 밑그림 등의 화두를 남기며 한국경제의 기틀을 다지는데 중요한 시간이었다.

특히 한국경제의 성장과 안정은 저물가, 저금리 정책을 기초로 해야 한다는 김재익의 경제관은 경제정책에 적극 반영되었고 이후 한국경제 계획의 기저로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