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숙의 CEO캐리커처] 아산 정주영 고 현대그룹 명예회장
이미지 확대보기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이 정주영 회장을 일컬어 ‘스스로 땅을 찾아 말뚝을 박은 사람’이라고 했듯이 정주영 회장은 현대그룹 계열사 하나하나를 기업 인수합병(M&A)이 아닌 창업을 했다. 그가 가진 무기는 뜨거운 열정과 포기를 모르는 불굴의 정신, 그리고 따뜻한 가슴이었다. 맨주먹으로 허허벌판이었던 곳에 조선소를 세우고, 자동차 정비공장을 자동차 제조사로 탈바꿈시키고, 중공업의 신화를 쓴 것도 그이기에 가능했다.
혹자는 정주영 회장이 포기를 모르는 성미 탓에 ‘불도저’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는 불도저 같은 추진력에 아래 직원을 배려하는 가슴 따뜻한 경영자이기도 했다. 직원들에게 “이봐, 해봤어?”라고 다그치는 동시에 자신의 뛰어난 통찰력과 역발상으로 난관에 부딪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주기도 했다.
우리는 인간 정주영을 얘기하면서 그가 성공을 이루기까지의 어렵고 힘들었던 과정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글로벌 Top3’를 향해 질주하는 현대자동차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아도서비스 공장을 살펴보자. 경성서비스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했던 그는 쌀가게 단골손님의 말 한마디에 미래에 자동차가 중요한 산업이 될 것임을 직감하고 자동차 정비업에 뛰어들었다.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한국 경제의 상징이라 할 경부고속도로 건설은 정주영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데 손색이 없다. 정주영은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건설 현장에서 살다시피했다. 자신이 현장에 머물러 있는 만큼 공기를 단축하고, 공사의 질을 높일 수 있다는 신념에서였지만 실은 당시 잠을 잘 수도 없었고, 잠이 오지도 않았다고 한다.
현대건설은 서울에서 오산까지, 대전에서 옥천까지 구간을 맡았는데, 처음엔 거침없이 공사가 진척되었다. 1968년 시공 열 달 만에 서울에서 수원 사이 고속도로가 개통된 데 이어 수원~오산 사이, 대구~부산 사이가 개통되었다. 이런 공사 진척은 당시로서는 단연 세계기록이라고 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난제가 주어졌다. 소백산이 가로 놓여 있는 옥천군 이원면과 영동군 용산면 사이 4㎞나 되는 당제터널이 문제였다. 이 구간은 토질이 단단한 경석(硬石)지대가 아니라 절암토사(節岩土砂) 곧 모래와 흙으로 된 퇴적층(堆積層)이어서 그야말로 난공사였다. 무려 열세 번이나 무너지는 사고를 겪은 뒤에 일반 시멘트보다 더 빨리 굳는 ‘조강(粗强)시멘트(rapid hardening portland cement)’를 활용해 드디어 성공을 거뒀다.
자동차와 건설에서 자신감을 얻은 그는 조선으로 눈을 돌렸다. 정주영은 1971년 9월 외국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한 장과 울산 미포만의 사진 한 장을 들고 런던으로 갔다. 영국 바클레이은행의 은행장을 만나 돈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No’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은 생소한 나라인 데다가 배 한 척 건조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조선소를 짓겠다고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정주영 회장은 말년에 통일의 꿈을 품고 소떼 방북이라는 대형 이벤트를 개최했다. 소 판 돈 70원을 들고 가출한 소년이 83세가 되어 1001마리의 소를 이끌고 1998년 6월과 10월 민간인 최초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남북 민간교류의 물꼬를 튼 세기적 사건이었다.
올해로 정주영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14주년이 된다. 현대가는 그가 떠난 후 경영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천재 경영인 정주영이 남긴 유산을 가슴에 되새긴다면 현대가는 오늘의 위기를 딛고 다시 세계로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노정용 기자 noj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