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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열정도 투자하라”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22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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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열정도 투자하라”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22주기

국내 최초 민간 철강기업 이끌며
연 매출 5조원 넘는 기업 성장시켜

고(故) 송원(松園)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사진=동국제강
고(故) 송원(松園)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 사진=동국제강
“투자를 하는 데는 과거의 경험, 축적된 노하우, 개인의 정열까지도 모두 투자돼야 한다. 투자를 할 때는 공적인 일을 하고 있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해야 한다. 설비, 생산, 건설, 영업까지 자기 손으로 해야 큰 경험이 된다. 모든 일은 시작하기 전 10분 전까지는 절대 늦지 않은 것이다.”

송원(松園) 장상태 동국제강 회장이 1995년 포항건설본부에서 임직원들에게 당부한 말이다.
4일은 고(故) 장상태 회장 영면 22주기 일이다. 동국제강은 지난 3일 경기도 소재 선영에서 고 장상태 회장의 22주기 추모식을 거행하고 고인을 추모했다. 주모식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상황을 감안해 유족과 친지 중심으로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원은 생전 주변 사람들에게 “내는 쇠에 미친 사람인기라!”라는 말을 자주했다. ‘바늘에서 선박까지-철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는다’는 신조로 송원은 73년 인생, 자신의 모든 것을 동국제강에 투자했다.

1927년 태어난 송원은 서울농대를 졸업 후 농림부에서 공직 생활을 하다가 돌연 미국 미시간주립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석사학위를 취득한 후 아버지인 대원(大圓) 장경호 창업자가 1954년 설립한 동국제강 경영을 돕기 위해 29세의 나이로 1956년 전무로 입사했다. 이어 1964년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포스코 설립자인 청암(靑岩) 박태준 명예회장은 중반 포항제철소를 건설할 당시 철 생산의 초보적인 문제부터 제품화 된 쇠의 공급(판매) 등에 이르는 모든 과정에서 생기는 의문점이 날 때마다 송원에게 문의를 했다고 한다. 고향과 나이가 같은 두 거인은 평생을 친구로 지냈다.

동국제강은 대원이 설립했지만 실질직인 성장은 송원이 주도했다. 동국제강의 성장사는 한국 철강산업의 성장사이기도 하다. 국내 최초의 민간 철강사인 동국제강을 이끌며, 1963년 부산 용호동에 민간 최대 철강 공장을 건설했다. 현대식 전기로 제강 기술 도입, 국내 최초 후판 생산 등 한국 철강산업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정부가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추진하려고 하자 1971년 2월 국내기업중 처음으로 후판사업에 뛰어들어 그해 2월 부산제강소에서 그해 2월 연산 15만t의 후판 공장을 준공해 생산을 개시했다.

1980년대에는 당시에도 1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 부산 제강소를 포항으로 이전시켰다. 내부의 반발이 거세자 송원은 “앞으로 조선산업 등이 성장할 텐데 이에 미리 대비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1991년 준공된 포항의 1후판 공장과 1998년 2후판 공장이 완성돼 연산 250만t 규모의 후판 생산능력을 갖추게 됐다.
2후판 공장을 건설할 당시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도래하며 동국제강의 경영난이 가중됐다. 이에 송원은 “지금 우리가 짓고 있는 새 공장에 우리 동국제강의 모든 미래가 걸려 있는 기라. 그래서 내도 이 공장 짓는 일에 비장한 각오로 임하고 있는 기고. 공장 짓는 일이라면, 공장 짓고 설비하다가 돈이 모자라면 마누라 반지라도 팔아다가 집어넣을 기고. 하모 단 돈 100만 원이라도 그리 할기다”라며 공장 건설을 밀어붙였다. 송원은 포항제강소 완공을 보지 못한 채 2000년 4월 4일 별세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대로 국내 조선업은 대호황기를 맞았으며, 1994년 매출 9000억원 수준이었던 동국제강은 2008년 5조6000원 규모로 성장했다. 그는 국가 산업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평가받아 금탑산업훈장,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수훈했다.

송원은 신념이 강하고 불도저 같은 추진력을 가진 기업가였다. 하지만 추진에 앞서 그는 늘 임직원들의 의견을 듣는 ‘합의 경영’을 실천했다. “결정이 다고 늦더라도 중지를 모을 경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 직원이 참여의식 고취와 일에 대한 자부심, 보람을 갖게 된다.” 신속한 의사결정에 따른 장점을 취하지는 못하더라도 성급한 결정으로 후회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철강회사를 꿈꾼 송원은 1998년 포항제강소에 “혼백이 되어서라도 기꺼이 달려와 동국제강의 수호신이 될 것”이라는 비문을 새겼다. 이 말은 동국제강인들의 마음에 깊이 인식되어 있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