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글로벌이코노믹

[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17)] 바람을 길들이는 미시간의 맥키낙 다리(상)

공유
0

[김종대의 스틸스토리: 다리이야기(17)] 바람을 길들이는 미시간의 맥키낙 다리(상)

미시간 주의 가장 긴 현수교 맥키낙 브리지.이미지 확대보기
미시간 주의 가장 긴 현수교 맥키낙 브리지.
미시간 주의 가장 긴 현수교 맥키낙 브리지는 맥키낙 해협을 이어주는 공급망 역할 뿐만 아니라 주변 자연환경이 아름다운 지역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곳 맥키나 해협을 찾아 호젓한 낭만을 즐긴다. 맥키낙 해협이 관광지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유명세를 타기 이전까지는 해협위로 다리를 놔야만 하는 절대 과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1957년 이곳 해협의 수면으로부터 168m 높이에 건설된 맥키낙 브리지가 건설되면서 맥키낙해협은 전혀 다른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강철을 꼬아 만든 현수교의 교과서처럼 인식되는 맥키낙 브리지 건설 이전의 역사와 완공까지의 스토리를 정리한다. <편집자 주>
맥키낙 해협은 서쪽의 미시간호와 동쪽의 휴런호 두 개의 오대호가 만나는 5마일 길이의 좁은 수로로 나뉘는 곳이다. 미시간 교통부 웹사이트 자료에는 이 해협은 약 1만2000년 전 빙하 활동의 결과로 생겼다고 기록했다. 오랫동안 사람과 물자의 이동을 가로막은 주범이라는 의미이다.

맥키낙 브리지가 건설된 어퍼 페닌슐라 지역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시골 지역이다. 다만 철, 구리, 목재 등의 천연자원이 풍부해 해협을 가로지르는 접근성 개선이 미시간 주민들에게 최우선 해결과제였다. 1880년대 초, 이곳에는 세 개의 개별 철도가 해협을 가로지르면서 철도 차량 페리 서비스를 운영했다.

1923년에는 미시간 주에서도 이 해협 북쪽의 세인트 이그나스와 남쪽의 매키노우 시를 잇는 자동차 페리 서비스를 시작했다. 이 서비스는 성공적이었다. 서비스하는 배가 8척으로 늘어난 만큼 호황을 보였다. 여행 성수기와 사슴 시즌에는 대기 손님이 5마일이나 밀렸다. 4시간 이상 기다려는 일도 빈번했다.

미시간 주 당국은 수년 동안 보트가 아닌 다리로 해협을 건널 수 있는 해결책을 찾고 있었다. 실행 가능한 아이디어가 등장한 것은 1920년 초였다. 해협을 건너는 수중 부유식 터널을 놓자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수로를 가로지르는 터널 건설은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미시간 주는 다른 방안을 찾았다. 직접 건널 수 있는 다리를 놓기로 한 것이다. 1934년 미시간 주는 맥키낙 해협 교량 당국을 설립했다. 그리고 수년간 보이스 블랑, 라운드, 맥키낙 섬을 '아일랜드 홉'으로 가로지르는 긴 노선의 교량건설 계획을 추진했다. 이 역시 아쉽게도 실패였다. 교량 건설에 필요한 자금 확보가 이뤄지지 않아 실패한 것이다.

다만, 당국이 선호해왔던 매키노우 시에서 세인트 이그나스까지 해협을 가로지르는 직선 노선은 이루어졌다. 1936년에서 1940년 사이에 당국은 지반 시추, 교통 연구, 얼음과 물 흐름 등의 연구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갈 채비를 모두 갖췄다.
시작된 공사(1939년~1941년)는 세인트 이그나스에서 해협 남쪽으로 4,200피트 길이의 둑길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 건설도 중단되고 말았다. 그 여파로 교량 건설 당국은 1947년에 완전히 해체됐다.

다리 건설이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한 것은 1949년이다. 윌리암 스튜어트 우드필은 다리 건설을 다시 들고 나왔다. 매키낙 섬의 그랜드 호텔 소유주였던 윌리엄은 시민 위원회를 구성하고 교량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급기야 교량건설 위원회가 1950년도에 구성됐다. 현재 맥키낙 교량 당국으로 불리는 곳이 바로 위원회의 조직을 물려받은 것이다.

이 당국은 1951년에 타당성 조사를 위해 오스마르 암만, 데이비드 B. 스타인만, G.B. 우드러프 등 세 명의 저명한 엔지니어에게 타당성 조사를 의뢰했다. 이듬해 프로젝트 건설이 주의회에서 승인되고 1953년 스타인만을 수석 엔지니어로 고용했다. 그리고 주 정부는 현수교 건설자금 9,980만 달러(약 1.317억 원)의 수익 채권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공사가 막 시작될 무렵 현수교는 위험하다는 의견이 나왔다. 현대 역사상 가장 끔찍한 교량 붕괴 사고가 발생한 이유이다. 1940년에 개통된 워싱턴 주의 타코마 현수교는 주 경간이 2,800피트로 세계에서 세 번째로 긴 현수교였지만 풍압에 불안정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고, ‘질주하는 거티’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스타인만은 마침 1940년 11월 7일 한 잡지 기사에서 ‘가벼운 강풍이 불 때 다리의 진동이 파괴적인 진폭으로 증가하여 주 경간이 끊어지고 케이블이 끊어져 208피트 아래 물속으로 추락했다’는 사실을 기고했었다.

스타인만은 아메리칸 사이언티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공학계는 재앙에 깜짝 놀랐다"며 "이 현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지만 업계에서 기록되지 않았거나 잊혀져 있었다"고 과거의 사례를 끄집어냈다.

스타인만의 기고문에 따르면 "1836년 영국의 브라이튼 체인 부두, 1854년 오하이오강의 휠링 다리, 1864년 나이아가라 강의 루이스턴 퀸스턴 다리, 1889년 나이아가라 폭포의 나이아가라-클리프턴 다리 등 많은 다리들은 바람에 의해 타코마 다리와 비슷한 형식으로 난파된 적이 있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리고 1930년 이후 불안하거나 위험한 공기역학적 진동이 있는 다리가 20개나 더 건설되었다고 주의를 끌었다. 1937년 세계에서 가장 긴 경간으로 완공된 금문교조차도 "위험한 공기역학적 진동을 겪었고, 1953년에는 공기역학적 작용에 대비해 구조물을 보강하느라 300만 달러가 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적시했다.

스타인만은 15년 동안 현수교의 공기역학적 안정성 문제에 대해 고민해 왔다. 그는 타코마 협착교가 공기역학적 힘에 대해 밝혀낸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현수교의 처짐 이론, 공기 역학 과학, 진동 분석의 수학적 이론이라는 세 가지 전문 지식 분야의 필수 요소를 결합한 새로운 과학의 창조가 필요했다"고 기고문에서 주장했다.

다리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과거의 실패 사례를 낱낱이 분석하는 스타인만의 노력에 의해 맥키낙 브리지는 다시 건설되기에 이른다. <계속>


김종대 글로벌이코노믹 철강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