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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의 산업시각] 유통업체가 인수?…US스틸發 철강산업 지각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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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명석의 산업시각] 유통업체가 인수?…US스틸發 철강산업 지각변동

가공‧유통업체 에스마크, 100억달러에 인수 제안
철강기업 간 벌어지던 M&A 영역 확대될지 관심
‘생산’에서 ‘판매’로 시장 지배 권한 이전 가시화
US 스틸 로고. 사진=US 스틸이미지 확대보기
US 스틸 로고. 사진=US 스틸
철강 제품 공정 단계상 ‘하공정’에 속하는 가공‧유통기업이 고로(용광로)로 쇳물을 만드는 ‘상공정’ 제철사를 인수하는 초미의 상황이 현실화할 전망이다.

성사되면 글로벌 철강업계의 새로운 지각변동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철강 산업 내에서 그동안 철을 ‘많이 뽑아내는 제철소’가 쥐고 있던 권력이 ‘많이 파는’ 유통업체로 이전되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보여, 그 미치는 영향이 어디까지 미칠지 관심이 쏠린다.

진원지는 미국의 대표 철강업체인 US스틸이다. 월스트리트 저널 등 현지 언론은 미국 비상장 산업그룹인 에스마크(Esmark)가 부채를 포함해 약 100억달러(약 13조3550억원)에 US스틸을 전액 현금으로 인수하겠다고 제안했다고 보도했다. 이 제안은 US스틸이 라이벌 클리블랜드 클리프스가 73억달러(약9조7491억원)릐 인수 제안을 거부한 지 하루 만에 이뤄진 것이다. US스틸 측은 ‘전략적 대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철강업체 간 인수‧합병(M&A)은 흔한 일이다. US스틸도 모체인 카네기 철강회사를 중심으로 여러 철강회사가 합쳐서 1901년 출범했다. 그런데, 이러한 US스틸을 인수하겠다는 에스마크는 제철소에서 공급받은 열연 강판을 가공해 고부가가치 철강재를 만든 뒤 이를 판매하는 가공‧유통기업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하공정 업체가 상공정 업체, 즉 종합철강회사를 인수하려는 것은 글로벌 철강 산업 역사상 거의 드문 일이다. 특히 US스틸처럼 한 국가를 대표하는 제철업체가 가공‧유통업체로부터 매각 제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도 ‘사건’이다.

철강 산업 내에서도 M&A는 수 없이 진행됐는데, 시대별로 특징이 있다. 첫째는 US스틸과 같이 국가 내에 난립한 철강업체를 하나로 묶어 조강생산 규모에서 경쟁사를 압도하는 M&A다. 이때는 말 그대로 철강사들이 합병을 주도했다.

그런데 2000년대 초중반 등장한 락시미 미탈이 철강 산업에 금융자본을 끌어들여 소위 말하는 ‘적대적 M&A’ 시대를 열었다. 2006년 당시 세계 2위였던 미탈스틸이 1위 아르셀로를 합병하면서 단일기업 최초로 연간 조강 생산량 1억t을 넘는 초대형 공룡이 탄생시킨 배경에는 금융자본으로 무장한 재무적 투자자(FI)의 역할이 컸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반발하면서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지만, 아르셀로미탈은 한국과 중국, 일본이 포진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신일본제철(현 일본 제철)과 포스코 등을 적대적 M&A하려고 했다. 아르셀로미탈이 연 금융자본의 철강사 인수는 최근에도 이어져 사모펀드(PEF)가 철강회사의 대주주로 등극한 사례가 많다.

또 다른 인수·합병은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중국은 중앙정부가 주도해 난립한 자국 내 제철 기업을 줄이고, 대형화하기 위해 인위적 M&A를 추진하고 있다. 대표 기업은 바오우그룹이다. 다수의 제철 기업을 인수해 2020년 아르셀로미탈에 이어 두 번째로 단일기업으로 조강 생산량 1억t 회사가 되면서 세계 최대 철강기업이라는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철강은 국가 기반 산업이므로 정부의 통제를 받는다. 미국과 유럽은 물론 일본 등도 철강기업 간 M&A도 정부가 개입하는 일이 많다. 현재의 일본 제철도 일본 정부의 산업 구조 개편 정책의 일환에서 비롯됐다. 이들 국가에서의 M&A는 철강 산업이 사양화하면서 벌어진 것인데, 연간 조강 생산량이 10억t을 넘어서며 전 세계 생산량 가운데 절반을 넘어서는 중국의 성장 때문이다. 이런 중국이 구조 개편을 하는 것은 비대해질 만큼 비대해져서 오히려 철강 산업의 성장 저해 요인이 되고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1990년대 중반부터 미국과 유럽 등에서 벌어진 M&A는 생존을 위한 기업가는 합종연횡이었고, 2000년대 중반 아르셀로미탈의 출현은 금융자본의 지배력 확산을 이끌었으며, 중국 철강사의 대형화는 중국의 영향력 심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마크의 US스틸 인수 시도는 좌절되더라도 철강 산업의 고착화를 깰 새로운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는 제철소에서 쇳물을 만들어 강판을 만들기를 기다리며, 하나라도 철강재를 더 납품받기 위해 현금을 들고 대기표를 받아 줄을 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판매가 아니라 분배의 시대, 제철소의 권력은 엄청났다. 철강재 공급과잉 시대가 도래해 제철소의 위상은 다소 낮아졌지만, 위상은 흔들리지 않았다. 고가 프리미엄 철강재는 특정 제철 기업만 생산하기 때문에 대체가 불가해 수요산업의 의존 현상은 더욱 뚜렷해졌다. 그런데 에스마크의 시도는 더 이상 철강 가공‧유통기업이 제철 기업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제철 기업 위에 군림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공급이 넘쳐나는 시장에서 살아남으려면 철강 수요산업 고객을 더 많이 확보해야 한다. 전통적인 개념의 제철 기업은 품질 좋은 철강재 생산에만 집중하는데, 이러다 보니 영업과 마케팅 능력은 떨어졌다. 이는 보다 가까이 고객의 곁에 있는 철강 가공‧유통센터가 보유한 강점이다. 이들 기업은 나아가 어느 제철소에서 강판을 공급받을지 ‘선택’한다. 제철 기업들은 인정하려 하지 않으나, 이미 시장의 권력 상당 부분은 가공‧유통센터로 넘어갔다. 이들 기업이 제철소를 인수해 운용한다면 철강 산업의 전체 사이클을 커버하는 진정한 종합 철강회사가 될 수 있다.

최근 탄소중립 실현의 일환으로 고로를 대신해 전기로를 추가 또는 신규 도입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데, 전기로의 확대는 보더 낮은 투자비로 상공정 철강사가 될 수 있다. 그만큼 가공‧유통기업뿐만 아니라 일정 규모 이상 철강재를 소비해 완제품을 생산하는 수요기업도 수지타산이 맞는다면 제철 기업으로 진화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 즉, 소수 대형기업이 독점했던 철강 산업 구도가 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아직 이러한 M&A는 일어나지 않고 있다. 다만, 가공‧유통업체의 힘이 세지고 있는 사례는 있다. 포스코그룹의 자회사 포스코인터내셔널은 포스코가 생산한 철강재의 국내 판매와 수출 등 모든 유통을 하고 있다. 코일 철근 시장 진출에 앞서 가공센터도 운영한다. 향후 포스코인터내셔널이 고객의 수요에 맞춰 포스코의 철강생산 계획을 결정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게 철강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채명석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oricms@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