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본명은 새뮤얼 무어 월턴이다. 영어로 Samuel Moore Walton. Samuel을 "Sam"으로 줄여 흔히 샘 월턴이라고 부른다.
1918년 미국 중부 오클라호마 주 킹피셔 출신이다. 다섯 살이던 1923년 미주리 주 체스터필드로 옮겨 그 곳에서 주로 성장했다. 사실상 미주리 주에서 성장한 셈. 스스로도 미주리가 고향이라는 말을 자주했다. 부모는 소를 길러 우유를 짜내는 목축업자였다. 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유복하지도 않은 시골 빈촌의 평범한 농가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인생철학은 "어려서 고생을 해봐야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가 소젖을 짜면 어머니는 우유를 병에 담았고 그 우유를 샘 월턴이 배달하면서 용돈을 벌었다. 일곱살 때부터 길거리에서 잡지를 팔았다. 중학교 때부터는 신문배달을 했다. 이 신문배달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어졌다.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새벽에 일어나 조간신문을 날랐다.

초등학교 때 보이 스카우트에 입단했다. 모범생으로 선발되어 미국 보이 스카우트 총연맹에서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이글 스카우트 상'을 받았다. 샘월턴은 그 상을 한평생 자랑하면서 살았다. 고교시절에는 농구와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성적도 상급에 속했다. 역사와 수학등에서 뛰어났다.
고교 졸업과 함께 인근에서 가장 명문으로 손꼽히는 미주리 주립대에 진학했다. 전공은 경제학이었다.필자도 이 학교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 유학시절 그 학교에서 샘월턴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필자와 샘월턴은 미주리대 동창이다.
대학의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실로 다양한 스펙을 쌓았다. 동아리 연합회장,학술단체 학생대표, ROTC 엘리트 모임 대표 그리고 성경연구반 회장 등을 두루 지냈다. 그 바쁜 와중에서도 학비와 용돈은 아르바이트로 벌었다. 식당 웨이터, 수영장에서 구조책임자 그리고 신문배달 등 닥치는 대로 했다. 특히 이 시기 신문배달을 기업형태로 키워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수많은 아르바이트 학생들을 고용해 배달구역을 늘려나가면서 큰 돈을 벌었다.
대학 졸업 후 경영학의 발상지이자 아이비리그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 스쿨 진학을 추진하다가 학비 문제로 도중 포기한다. 샘월턴이 인생에서 가장 아파하는 대목이다. 와튼 MBA를 하지못한 것은 두고 두고 아쉬움으로 남았다.
대학원 진학 대신 가게에 취업해 본격적으로 돈을 벌기시작했다. 샘월턴이 상점 점원으로 사회에 처음 나온 그때가 1940년 6월이다. 아이오와 주의 데모인에 있는 작은 상점에서 18개월 동안 물건을 팔았다.
그러다가 1942년 입대한다. 장교 신분이었다. 2차대전 참전으로 병력이 필요했던 미국 국방부가 대졸자들을 대상으로 대거 장교로 선발했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탓인지 보직이 관리쪽에 쏠렸다. 항공기 공장이나 포로수용소에 배치되어 조직이나 물품을 관리하는 일을 주로 맡았다. 군 근무 중이던 1943년에는 헨렌 롭슨과 결혼했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의 후손들이 지금도 월마트 주식을 장악하고 있다.

그는 회고록에서 “벤프랭크린 백화점의 경험을 통해 원가 80센트인 물건을 1달러로 파는 것이 1달러20센트로 파는 것보다 세 배 이상 더 많이 팔 수 있다는 것을 직접 깨달았다”고 술회했다. 싸게팔면 물건 하나 당 이윤은 줄어들지만 총판매량이 세 배 이상 늘어 결과적으로 총 이익은 훨씬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박리다매의 장점을 잘 알고 실천에 옮긴 것. 그는 또 “ 1달러를 벌기 위해 얼마나 힘들게 일해야 하는지 10살이 되기 전에 깨달았다”고 지적하면서 “소비자들의 그 소중한 1달러를 위해 할인점을 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싸게 팔아 주위 사람들의 돈을 지켜주고 나아가 인류사회에도 기여하겠다는 나름대로 깊은 경영철학이다.
벤프랭클린에서의 염가할인 판매는 대성공이었다. 2년 만에 빌린 돈을 모두 갚았다. 그리고는 '이글스토어'라는 가게를 하나 더 냈다. 여기서 5년 만에 연 매출액 25만 달러를 올렸다. 당시로서는 업청나게 큰 돈이었다. 아칸소 주 전체를 통틀어 샘월턴의 이글스토어는 매출과 이익이 가장 많은 상점으로 명성을 날렸다.
애석하게도 샘월턴은 뉴포트에서 더 이상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임대기간이 끝났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의 상가임대차 계약기간은 5년이었다. 임차인인 가게 운영자가 원하면 5년 후 계약을 한 번 더 연장할 수도 있었다. 단 그러기위해서는 첫 계약을 할 때 5년 후 재계약 여부를 임차인이 결정한다는 옵션조항을 단서조항으로 계약서에 달아두어야만 한다. 샘월턴은 무심결에 그 옵션계약을 빠뜨렸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무리 애걸해도 점포주인은 계약을 갱신해주지 않았다. 이 사건 후로 샘월턴은 어떤 계약서이든 수십 번을 곱씹어 본 다음에야 서명을 하는 습관을 갖게됐다.인생의 큰 교훈을 얻은 셈이다.

마침내 1962년 7월 2일 아칸소 주의 로저스에 월마트 1호점을 개점했다. 샘 월턴이 주도하는 프랜차이즈의 시작이었다. 첫 2년간은 부진했다. 스프링데일과 해리슨에 2호점과 3호점을 낸 후 규모의 경제효과가 생기면서 조금씩 살아났다. 그 때 전략도 물론 할인판매였다. 월마트라고 하면 모든 사람들이 무조건 낮은 가격과 고객 만족을 떠올리게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 다른 어느 상점도 월마트보다 더 싼 가격으로 팔 수 없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그 작전이 주효했다.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환불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도 이때 만들어진 경영철학이다.
샘월턴은 중소도시 외곽에 점포를 세워나가는 전략으로 월마트를 계속 늘려 나갔다. 당시 대부분의 유통업이 번화한 도시로 뻗어나가던 것과는 대조적인 방식이었다. 상대적으로 더 우호적인 지역을 찾아 특공대 형식으로 먼저 선발 가게를 연다. 그곳에서 염가할인으로 세력을 다진 다음 그 명성을 토대로 인근에 수십개 점포를 동시에 세워 일대를 싹쓸이하는 방식이다. 1969년 월턴의 가게는 잡화점 14개와 월마트 18개로 늘었다.
1970년 10월 1일 뉴욕증권거래소에 월마트를 상장시켰다. 상장 첫날 주당 거래가격은 16달러50센트였다. 당시 모금한 자금은 뉴욕 증시 사상 최고기록이었다. 기업공개로 월마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금을 보유한 명실상부한 세계의 최고의 기업 반열에 올랐다. 기업공개로 모은 돈의 힘으로 물건값을 더 낮추었다.

56세이던 1974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년 만에 복귀했다. 부재중에 젊은 사원들과 나이 든 사원들이 싸워 큰 혼선이 빚어졌다. 사태수습을 위해 다시 돌아온 것이다. 복직 후 사내 분규에 가담했던 직원들을 무더기로 잘랐다. 이로 인해 여론이 크게 악화되기도 했다. 1991년 장로교 자선 사업에 600만 달러를 기부했다. 교회에 300만 달러를 기부하기도 했다. 1992년 3월 17일 미국시민으로서는 최고 영예의 상인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자유의 메달은 백악관에서 수여식을 하는 것이 관례다. 그러나 당시 대통령 부부는 직접 벤톤빌로 날아와 수여식을 했다. 암 투병 중인 샘 월턴의 건강상태를 고려한 배려였다.
그는 한평생 ‘매일같이 싼 가격으로 제공한다’는 ’EDLP‘의 정신을 실천하면서 유통혁명을 이루었다. 1992년 4월 5일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혈액암으로 사망했다. 향년 75세였다. 월턴은 갔지만 그가 만든 월마트는 세계최대의 기업으로 지금도 뻗어가고 있다.그의 할인정신은 비단 월마트뿐 아니라 인류 사회의 등불이기도 하다.

김대호 연구소 소장 (경제학 박사) tiger8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