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납적 지식의 권위에 배신당하지 않기 위해
이미지 확대보기한 농부가 칠면조를 키우고 있었다. 친절한 농부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칠면조에게 먹이를 가져다준다. 먹이를 받아먹을 때마다 칠면조는 ‘친구’인 인간이 자신을 위해서 먹이를 제공해 준다고 하는 믿음이 더욱 확고해지게 된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상하는 바와 같이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 믿음은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농부는 추수감사절 메인 요리를 식탁에 올려놓기 위해 가차 없이 칠면조를 살육할 테니까.
이것은 철학에 있어서 귀납법 혹은 귀납적 지식이 가지고 있는 태생적 문제를 지적한 일례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싶다면 면밀하게 관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러나 조심할 점은 이것만이 왕도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초•중•고 시절 관찰을 통한 과학적 지식의 유용성에 대해 끊임없이 세뇌 받아 왔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칠면조는 지극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친절한 주인을 관찰했으며, 그 관찰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인간에 대한 신뢰는 견고해졌을 것이다. 자신이 그 인간의 식탁 한 가운데 오를 그 날이 하루하루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다시 말해 칠면조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주인을 관찰했지만,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예측하지 못했다.
우리가 초•중•고를 통해 배운 귀납적 지식의 가장 우려스러운 점은 바로 이 예화와 같은 측면이다. 선형적 관계를 전제로 하는 학교와 교과서에 의해 견고히 구축된 지식체계는 세계를 더욱 쉽게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들은 결정적으로 실제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어쩌면 그토록 열심히 머릿속에 꾹꾹 몰아넣었던 지식이 어느 순간 최선의 경우에 쓸모없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치명적인 파국을 낳게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왜 대학에 가는가] 2편은 다음주에 계속됩니다.
신현정 중부대 교수
































